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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들의 TV 출연부터 지하철광고까지 만연한 의료상업화, 의료의 가치를 추구할 수 없는 왜곡된 의료제도 탓인가

    선진국에선 면허 독립성 인정, 의료상업화 규제…의료의 가치 살릴 수 있는 사회적 담론 형성을

    [칼럼] 안덕선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장

    기사입력시간 2019-05-20 06:52
    최종업데이트 2019-05-21 00:32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요즘 시대에 의사가 되기 위해 습득하고 있는 현대 의학적 지식과 학문의 내용은 유사하면서 점차 세계적으로 표준화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 환자와 의술을 제공하는 방식은 환자와 의사의 만남부터 각 나라마다 특징을 달리하기 시작해 ‘의료(medical practice)는 문화다’라는 대명제의 근거가 되고 있다. 혹자는 이를  ‘의료문화’로 압축해 표현하기도 한다. 

    유럽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우리나라와 비슷한 형태의 병, 의원 광고를 찾아보기 어렵다. 기껏해야 초록색의 십자가 모양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약국을 상징하는 공인된 표기로 개인 의원의 간판은 찾아 볼 수 없다.

    반면, 이웃나라인 일본에 가면 지하철역에 ‘○○의원’ 또는 ‘○○과’ 등 개인 의원의 간판을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한 술 더 떠 사람들로 붐비는 지하철 객차 안에도 해상도 높은 컬러의 적나라한 수술 전후 사진과 함께 성형외과에 대한 광고물이 넘쳐난다.

    학회 참석차 서울에 온 외국인 의사친구는 지하철 내 성형 광고를 보고 나서 천박한 의료문화로 보인다며 순기능 보다는 역기능이 활성화 될 수 있어 반드시 없어져야 할 문화라고 열변을 토한 적이 있다.  

    간혹 지나가는 버스 몸체에 붙어 있는 대형 광고판에 제자들이 의사 가운을 입고 일렬로 서서 찍은 사진을 마주한다. 물론 성형 광고로써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우리나라 의사들처럼 소위 대중의 알권리와 정보공유를 위해 헌신하는 나라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TV 출연부터 지하철광고까지, 의료상업화 만연한 대한민국 의료 현실 

    한동안 흰 가운을 입고 TV 개그 프로그램이나 대담 쇼(talk show)에 출연하는 속칭 ‘쇼 닥터’가 문제가 됐다. 의료의 대중화를 위해 개그화한 것인지, 개그를 의료화한 과정인지 해당  장면들을 볼 때 마다 혼란스러웠다. 아직도 이러한 현상은 현재 진행형으로 상존하고 있으며, 동시에 한의사들까지 적극 가세(?)해 민족의학의 개그화를 위해 다양한 형태로 방송의 많은 부분을 점유하고 있다.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건물 옥상이나 벽면에 커다란 간판 속에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미소를 띤 채 부풀려 과대 포장한 해외연수 경력이나 출신대학을 버젓이 자랑하듯 화려한 색채의 광고로 비만에서 통증, 성형, 피부, 미용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메뉴’를 내걸고 있다. 이것 역시 유럽이나 캐나다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풍경들이다. 필자는 그 원인에 대해 “선진국들은 의료광고에 대한 규제가 매우 까다로워서일까”라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

    의사나 치과의사가 전문가 단체의 입장에서 전문 직종 내의 통일된 합의에 의하여 기술한 바람직한 의료(진료)의 수준과 의사의 행동을 명확하게 정리한 것이 바로 진료표준(practice standards)이다.

    따라서 진료표준이 의미하는 것은 바람직한 의료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훨씬 뛰어 넘는 것이다. 진료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다시 말해 일정 수준 이하의 진료 행위에 대해서는 전문직 스스로가 결성한 면허관리 기구에서 행정처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진료표준(practice standards)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code of conduct’로 우리말로는 행동강령 내지 행동수칙으로 표기된다. 강령이나 수칙은 의사면허를 취득한 이상 전체 의사 회원들이 합의한 의료수준을 준수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면허기구가 잘 정비돼 운영되고 있는 나라를 방문해 보면 우리나라나 일본이 보여주는 의원 및 병원에 대한 간판을 찾아볼 수가 없다. 이로 인해서 사전에 뚜렷한 대책 없이, 그리고 사전 준비 없이 병의원을 찾아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설령 찾는다 해도 의사를 만나보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급한 일은 사회적으로 약속된 지정 전화번호로 연결하면 즉시 의료 안전망에 접속되어 필요한 후속 조치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만일 우리나라처럼 한껏 우아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의사의 단체 사진이 포함된 간판을 버스에 부착할 경우 선진국에서는 의료의 품격을 손상시킨 것으로 간주 될 수 있다. 우선 이런 것이 우리나라식 속된 표현으로 “쪽 팔린다”라는 사고가 강해 이런 형태의 광고를 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 의료문화의 규범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광고를 하다 적발될 경우 의사면허기구로부터의 호출과 함께 상업성과 품위손상에 대한 엄중한 주의나 경고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면허관리의 근간인 자율규제가 잘 정비되어 있는 나라와의 차이는 면허관리의 차이 뿐 아니라 의료문화 또한 매우 다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필자는 우리 의료문화에 대하여 옳고 그르다, 좋다 나쁘다는 식의 이분법적 도덕적 판단을 하려는 의도는 없다. 이것은 현재 개인적 판단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른 의료문화에 대한 비교와 고찰은 전문 직업성의 발달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도, 그냥 간과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 나라의 교육과 의료는 그 나라의 배경이 되는 뿌리 깊은 역사와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하고 복잡한 외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의료문화 역시 의료제도와 함께 다른 외적 요인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의사의 전문 직업성(professionalism)에 대해 치열한 논의와 단단한 학문적 기반을 200년 이상 다져온 유럽지역에서는 인류의 건강과 생명의 숭고한 가치를 담고 있는 의료에 대해 그 품격을 손상시킬 수 있는 상업적 경계를 윤리강령이나 수칙의 형태로 엄중하게 명문화해 준수토록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이미 의료기술의 선진국 대열에 진입해 있는 우리나라는 아직도 의료의 상업성이 내포하고 있는 논쟁의 본질을 향해 제대로 된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상업성을 쉽게 설명하자면 의료는 유통방식이 일반 상품처럼 돼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반드시 공공재와 대비되는 개념도 아닌, 의료자체에 담겨진 고유의 가치를 최대한 드높일 수 있는 형태로 의료와 환자에 대한 소통과 만남의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공공재로 인식되어 비영리를 표방하는 관제 주도 방식의 우리나라 의료문화는 상업적 경영의 극치를 보여준다. 역설적이면서도 모순된 모양새를 띠고 있다. 

    프랑스 등 의료상업성 규제, 의료인면허 독립성 강조가 이유 

    의료 상업성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단행하는 국가의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 구강외과 전문의 면허를 관리하는 단체가 채택한 윤리강령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R 4127-215)이 들어 있다. 

    구강외과 전문의가 진료하는 진료장소(개원장소)에 대한 규정으로 “구강외과 의사는 상거래와 같은 진료는 하지 않는다”라는 전제를 서두로 한다. 진료장소가 상업적인 배치나 상업적인 신호(인상)를 주는 외관을 갖는 상용건물, 주거 단지 내 독점적 상가 그리고 직, 간접 광고와 과학적이나 교육적 목적이외 구강외과관련 구경거리나 행사를 엄격히 금지시키고 있다.

    의사나 치과의사 개원 장소는 명함보다 약간 큰 크기의 주소와 의사 이름 그리고 전공과목, 진료시간, 전화번호만 기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명판의 크기 초과나 출신대학 등 약력 기재는 일체 불허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구강외과 전문의로서 하지 말아야 할 품위손상인 환자 유인책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프랑스 구강외과 의사들만 유난히 개원 장소 선택에 제한적이며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 것일까. 

    실제로 유럽을 돌아다녀 보면 프랑스만의 독특한 의료문화도 아니요, 구강외과 의사들에게만 국한된 규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이들 지역이 갖고 있는 각 나라마다의 의료윤리 강령이나 수칙을 읽어 보면 볼수록 우리나라의 의료문화와는 매우 다르고 격차가 크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개원의 성공 조건으로 우선 좋은 목(자리)을 차지하는 것이다. 상가 건물이 완성되기 전에 의원, 병원의 입점을 알리는 현란한 현수막을 내걸고 있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교회와 요양원, 치과, 한의원, 약국 그리고 노래방 등 사람들이 즐겨 찾는 업종들이 하나의 종합세트처럼 클러스터를 형성하는 듯하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상가의 번영이 곧 의원과 병원의 번영과 직결된다는 강박관념이 내재돼 있는 느낌이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는 이미 벌써부터 초고령 사회에 대비한 도시사용계획의 선구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 요즈음 회자되는 지역사회 통합 돌봄 서비스가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의 상가건물을 통해 원스톱 연계 구조망을 확보하고 있는 것처럼 비춰지기 때문이다. 

    선진사회에서 도시의 의사들은 대부분 메디컬 오피스 빌딩(medical office building)에 들어가 있다. 상가건물의 입주는 실제로 매우 드문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각종 영상매체에 등장하는 의사의 노출 건수를 집계하면 단연코 세계 최고를 기록할 것이다. 의사 뿐 아니라 다양한 교수의 직함(겸임교수, 초빙교수, 대우교수, 석좌교수 등) 을 갖는 식자층의 출현도 타국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이른 바 가방 끈이 가장 길다는 의사, 변호사, 교수 등 식자층의 개그 프로그램 고정출연은  종종 지식가공 유통 소매업 내지 지식재롱 공연이나 장기자랑 수준의 민낯처럼 보여 질 때가 있다.

    의사는 종종 다른 출연자들은 안 입는 하얀 가운을 입고 등장한다. 대중매체의 섭외 요청에 의해 의학 지식이나 의료정보 제공 차원에서 어쩌다 한번쯤 출연 경험이 있는 의사라면 단 한 번의 노출로 환자증가나 명성에 대한 파급력이 엄청나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는 유혹으로 꼽을 수 있겠다. 

    필자 역시 과거에 병원홍보팀의 주선으로 출연한 경험이 있다. 분명히 상업적 목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파급효과는 비록 단기간이었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아예 고정 프로그램화 한 연예기획성 의료프로그램은 한 나라의 중심 가치를 창조하는 전문직이 개그화 된 세계 최고의 평등화 된 민주국가인지 아니면 화려한 한류문화를 선도하는 연예 왕국인지 가치관을 매우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전문직이 창조하는 우리나라의 중심가치가 영상매체 혹은 다양한 사회적 연결망을 통한 자신의 화려한 마케팅 수법을 통해 부가적 이득을 실현하는 것처럼 잘못된 방향으로 인도되는 것처럼 보여 입맛이 개운치 않다.  

    우리나라의 상당수 의원이나 병원이 왜곡된 살인적 저수가 체계의 의료 현실 속에서 그나마 안간힘을 쓰며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소위 소득주도 성장을 위해 성형, 피부, 비만 등을 표방하며 상가에 입점하면 환자진료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요란하고 번들거리는 막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실내장식이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선진국에서 이런 것도 금기 사항이 될 수 있다. 건물이 상업적으로 보이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인데 우리 문화에서는 선뜻 수용하기 힘들 것이다. 

    상가 건물 내에 자체 번영회도 존재하고 이, 미용업, 손발톱 돌봄 업주인 원장들이 반 농담 삼아 의사들이 인사도 안 온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거나 어떤 이들은 노골적으로 환자소개 연결망 제안과 리베이트를 요구한다는 말도 들린다. 겉으로 보면 이들도 호칭이 원장이고 의원을 열고 있는 의사도 원장이다. 직업에 귀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현대의학의 전통은 전문직이 수호해야할 가치가 따로 존재하여 귀천은 없어도 의료가치 수호를 위한 품격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분명한 원칙이 정립되어 있다.   

    어쩌면 지나치게 보일 수 있는 선진국의 의료에 대한 상업성에 대한 방지책과 우려의 이유는 의료만큼 의사에게 독립성이 강조되는 분야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선진국에서 의사 독립성의 훼손은 자신의 품위 손상은 물론이거니와 곧 환자에 대한 의무가 파괴된 것으로 간주한다. 환자진료로 인해 발생되는 이득 이외 다른 어떤 이득을 위한 서비스를 제한하고 있으며 규범으로 정하여 금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의사는 일반 서비스 종사자와는 다른 위치에 있고 환자의 요구에 대한 무조건적 수용이나 새로운 요구의 창출은 곧 상업적 관계로 의사와 환자 간 신뢰의 파괴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곡된 의료환경 만든 범사회적 차원의 고찰 필요 

    영어로 ‘medical practice’는 ‘의료’로 번역된다. 

    그러나 실상 영어에서 practice는 의료와 법에서 가장 흔히 사용된다. 

    스코틀랜드의 철학자 알래스더 맥캔타이어는 practice의 속성을 내적 재화(internal goods)와 외적 재화(external goods)로 설명한다. 내적 재화는 수월성(excellence)이고 내적재화의 추구는 2차적인 외적재화의 획득으로 신분과 돈, 명예, 지위, 자격 등을 얻는 것이다. 

    의료에서 ‘상업성’이란 내적재화인 환자에 대한 최선의 의료제공이 아닌 외적재화의 우선적 추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왜곡된 의료제도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서양의학의 내적가치를 추구하면 부차적으로 외적재화가 과연 따라 올 수 있는 환경인지, 아니면 나라의 제도가 의사 스스로 practice의 가치를 파괴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한번쯤은 범사회적 차원의 깊은 고찰을 요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 중심가치의 창조에 대한 몫은 책임 있는 정부나 정치인이 아닌 전문직의 의무로 벗을 수 없는 굴레로 씌워져 있는 현실은 받아들이기 힘든 아이러니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