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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진 구속 의사' 전공의가 마주한 의료사고... 젊은 의사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주당 100시간 근무하던 전공의 시절 형사소송, 사람죽인 의사로 낙인 찍히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경기 성남 횡경막 탈장 오진 사건 가정의학과 전공의 인터뷰…금고 1년 집행유예 3년 선고

    기사입력시간 2019-02-16 13:29
    최종업데이트 2019-02-16 21:08

    사진: 가정의학과 전공의였던 의사 김기영(가명·37)씨가 의사 생활 내내 쓰던 청진기를 가지고 왔다. 그는 "청진기는 저렴한 보급품에 불과하지만 의사로 첫 발을 디뎠을 때부터 함께 했다"며 "청진기를 보면서 처음 의사를 꿈꿨을 때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메디게이트뉴스 정다연 기자] 지난 2013년 8세 어린이 횡경막 탈장을 변비로 오진한 의사 3인의 항소심 판결이 15일(어제) 선고됐다. 응급의학과 의사는 무죄를, 소아청소년과 의사는 금고 1년6개월에 집행유예 3년 및 사회봉사 40시간 명령을 선고 받았다. 오진 구속 의사 3인 중 사고 당시 가정의학과 전공의(현재 가정의학과 전문의)였던 의사 김기영(가명·37)씨는 응급의학과 전문의에게 보고하지 않은 점,  영상의학과 전문의에게 판독 요청을 하지 않은 점 등을 이유로 금고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메디게이트뉴스는 항소심 공판이 진행 중이던 지난해 12월 피고인 중 한 명인 당시 가정의학과 전공의를 잠실역 인근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 인터뷰는 그가 재판에서 밝히지 않은 사연을 담았다.

    흰 가운을 벗은 김씨는 점퍼에 검은색 백팩을 메고 나왔다. 그의 시간이 의료사고가 발생한 당시에 멈춰 있는 탓일까. 항소심 첫 공판에서 본 이후 한 달 만에 본 김씨는 또래보다 어려보여 마치 대학생처럼 보였다. 전보다 살도 확연히 빠진 듯했다.

    김씨는 "한 사람당 한 평도 주어지지 않는 좁은 구치소에서 한 달 넘게 있었더니 살이 10kg 가량 쪘다. 요즘 많이 걸어다니면서 원래 체중으로 돌리려고 노력하는 중이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는 형사소송 이후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공판기일마다 참석해야 하는 의사를 환영하는 병원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다. 구속 전에는 소송비용과 합의금을 부담하기 위해 요양병원에서 단기로 일을 했지만 그마저도 지금은 그만둔 상태다.

    김씨는 전공의 신분으로 유례가 없던 법정구속을 겪었다. 그는 병원에서 수련하는 의사들이 처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토로하며 전공의를 위한 법적 상담 창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씨는 인터뷰에 앞서 "먼저 제게도 책임이 있는 고(故) 신군과 가족분들께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는 말을 기사 첫머리에 꼭 실어달라고 당부했다.

    인력이 부족한 응급실서 수련기간을 보내야 했던 가정의학과 전공의

    김씨는 경기도 성남시 소재 A병원에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인턴으로 1년, 전공의로 3년을 일했다. A병원에서 김씨는 수련받는 의사면서 동시에 비정규직 직원이었다. 그는 법정근무 시간을 보장받지 못한 채 병원에서 주당 90~100시간을 일했다고 했다. 

    그는 "근무시간 기록지에 주당 80시간을 넘지 않은 것처럼 적어내라는 압박을 받았다. 부당하지만 문제제기는 하지 않았다. 전국의 전공의들이 다 그런 처우를 받으며 일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당시 가정의학과 전공의 1년차였던 김씨가 응급실에서 진료를 했던 이유에 대해 물었다. 김씨에 따르면 병원마다 차이가 있지만 전공의는 임상 현장에서 각 진료과를 돌면서 배우고 경험을 쌓는다. 하지만 김씨는 병원의 지시에 따라 전공의 기간 대부분을 인력이 부족한 응급실에서 보내야 했다.

    김씨는 "말은 응급의학과 파견이었지만 솔직히 병원측에서 싼 값에 인력을 부리려는 구실이었다. 당시 병원은 인턴도 응급실에 많이 파견했다. 나도 인턴 때부터 응급실에서 많이 일했다"며 "사고 이후 병원은 가정의학과의 응급실 파견을 없앤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사고 당시 응급실의 상황을 떠올리며 김씨는 인계시간에 응급의학과 과장이 없었던 점, 초진 환자로 파악했던 이유, 당시 병원 시스템의 한계를 언급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도 말했지만, 신군이 응급실에 왔을 당시에 응급실 과장님의 인계시간이었다. 응급실 과장님이 다른 응급실 과장님께 인계를 하고 퇴근을 해야하는데, 앞 시간 과장님은 먼저 퇴근하고 다음 시간 과장님은 아직 출근하지 않은 상황이었다"고 밝혔다.

    김씨는 "아이의 상태를 확인 받을 과장님이 응급실에 안 계셨다. 당시 신군의 상태는 안정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나는 상태가 좋지 않으면 다시 오라고 일러주고 보냈다"고 말했다.

    김씨는 "게다가 나는 신군을 진찰할 당시에 신군이 병원에 수 차례 방문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약을 처방할 때 보호자가 '전에 받은 약이 집에 남았다'고만 해서 1차 병원에 들렀나 보다고 짐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2013년 당시 병원은 수기기록과 전자의무기록(EMR)을 함께 쓰고 있었다. 병원에 자주 오거나 당뇨약 오래 드신 분들은 접수처에서 주의하라고 종이 차트를 함께 주는데 그때는 따로 전달 받은 차트가 없었다"며 "나로선 당연히 초진 환자인 줄 알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내가 당시 수기기록만 하고 EMR을 쓰지 않았던 이유는 완전 전산화까지 돈이 많이 들고 그래서 병원에서 수기 기록을 같이 병용했기 때문이다. 전공의가 종이차트에 기록해서 간호사에게 건네면 간호사가 오더를 대신 써주는 시스템이었다. EMR은 과장들이 썼다"며 "지금은 모두 EMR을 사용하는 만큼, 재진환자의 경우 자동으로 팝업창이 떠서 주의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 마련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련 과정 전공의는 의료사고 이후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환자의 사망은 유가족 뿐 아니라 의사에게도 되돌릴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김씨는 자신이 놓쳤던 환자를 떠올리며 자책감에 시달렸다고 했다. 그는 사고 이후 우울증과 트라우마가 생겼다. 하지만 그는 의료사고 이후 달라진 병원과 동료들의 태도에 다시 한 번 상처를 받았다. 좋은 의사가 되기 위해 달려온 삶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그는 하루 아침에 '사람을 죽인 의사'로 낙인 찍혔다.

    김씨는 "다음날 오전에 응급실로부터 신군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괴로웠다. 나보다 더 실력 있는 의사가 봤다면 달라졌을까, 우리 병원보다 더 큰 병원에 갔다면 달라졌을까 수도 없이 생각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되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나를 힘들게 한 것은 어린 환자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는 자책감뿐이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

    김씨는 "당시 저임금으로 법정 근무시간을 초과하면서까지 의사로서 내 삶을 바쳐 일했던 병원으로부터 버려졌다. 그 사실이 나를 더욱 힘들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신군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병원에 알려진 이후 나를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고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병원에 저런 바보도 있냐'는 말도 들었다"며 "지도 과장님은 '내가 너 감싸주려고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자주 핀잔을 줬다. 정작 내가 형사소송으로 경찰 조사를 받는 줄은 전혀 몰랐다"고 밝혔다.

    그는 "구치소 생활도 힘들었지만 전공의 3년차 시절은 심정적으로 더 괴로웠다"고 말했다.

    A병원이 민사소송에서 일부 과실이 있다는 판결을 받은 이후였던 지난 2015년 9월 20일, 전공의 3년차였던 김씨는 경찰로부터 조사를 받으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후 형사소송이 시작 됐다. 당시 병원은 소송이 시작 되자 나몰라라 했다.

    김씨는 "소송이 시작되자 변호사 비용과 합의금이 부담으로 느껴졌다. 인턴, 전공의 생활 동안 모은 돈은 몇 푼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전공의에게 일을 시킬 땐 법을 어기면서까지 부려먹던 병원은 도움은 커녕 소송을 상담해줄 변호사조차 연결해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경찰 조사 이후 1년간 우울증 치료를 받았다. 전문의 시험을 준비할 시기였는데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아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지냈다"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원쪽에 변호사가 있다던데 저 상담해줄 변호사는 없느냐'고 여쭤보니까 '너 상담해줄 변호사는 없다'는 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대부분은 각자의 일이 바빠서 무관심 했다. 2016년 2월 전공의 계약 3년이 끝나고 나는 병원을 나왔다. 의료사고가 발생했으니 재계약은 없었다. 이후 전문의 시험을 치렀지만 우울증 때문에 2번이나 떨어졌다. 2018년에 전문의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그 시간은 내 생애 가장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 뿐 아니었다. 병원은 전공의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의료사고가 발생한 책임은 병원에서 책임지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 수련받는 전공의에게 향했다. 전공의에겐 병원의 지시를 부정하고 거부할 힘이 없다.

    김씨는 "경찰 조사때 응급실에 신군의 상태를 보고할 응급의학과 과장님이 없었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보니 마치 응급의학과 과장님이 있었는데도 내가 혼자서 멋대로 진료를 했던 것처럼 되어 있었다"며 "나중에 '당시에 병원에서 그렇게 하자고 입을 맞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심지어 병원장은 전공의 3년차때 나를 불러 '네가 죄를 인정해도 기껏해야 벌금형 나올 것이다'며 나 혼자의 잘못으로 하자고 종용했다. 나는 전공의라서 병원에서 버림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전공의는 병원에서 언제 쓰다 버려도 되는 '체스판의 말' 같은 존재였다"고 덧붙였다.

    김씨는 "경찰 조사를 받을 때부터 나는 내게도 책임은 있다고 말했다. 내가 아니라 실력 있는 다른 의사가 봤으면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도 했다"며 "나는 처음부터 합의할 의사도 있었지만 합의금을 낼 여력이 없었다. 두 과장님은 나와 달리 일관되게 무죄를 주장했기 때문에 합의를 하지 않았다. 1심에서 법원이 합의할 시간을 충분히 줬는데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그 점이 법정구속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 추측한다"고 밝혔다.

    "전공의 희생으로 돌아가는 의료체계 개선해야"

    아이들을 좋아했던 김씨는 의료사고 이후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는 어린 아이들이 자신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까봐 두려워 진료를 하지 못한다. 그에게 의사가 된 것을 후회하냐고 물었다.

    김씨는 "의사가 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여전히 마음은 무겁고 힘들다. 하지만 앞으로 살다보면 의사로서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의사가 된 지 10년 밖에 되지 않았고 이제 전문의를 땄으니 새내기 의사나 다름 없다"며 "나중에 소송이 끝나면 해외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전공의로서 의료사고를 겪고 전공의로선 처음으로 법정구속까지 된 김씨는 전공의의 희생으로 돌아가는 의료체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냈다.

    김씨는 "전공의들이 어려움을 털어놓을 곳이 없다. 인턴의사와 전공의에 대한 병원의 감시는 심하다. 인턴 같은 경우에는 병원 내 평판이 점수로 매겨지고 결국 그 점이 좋은 과로 갈 기회로도 이어진다"며 "평판 점수 등으로 인해 인턴과 전공의는 억압된 삶을 살고 있다. 부당한 일이 있어도 불평을 토로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나도 하루에 삼각김밥 하나로 끼니를 때우고 일했다. 집에 가지 못하고 병원에서 선잠을 자면서 일을 했다"며 "힘들다는 말을 꺼내지도 못할 만큼 여유 없이 살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 벌어지는 책임을 비정규직인 인턴이나 전공의에게 돌리는 것이 옳은 일인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인턴과 전공의가 법적인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창구가 있어야 한다. 근로기준법을 적용할 때는 인턴과 전공의가 배우는 입장이라고 주당 52시간을 훨씬 초과하는 주당 80시간을 합의해놓고 정작 법적 책임 앞에서는 알아서 하라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훌륭한 의사를 양성하려면 그들이 제대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고 그들을 책임져 주는 시스템도 갖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때 환자 가족이었던 의사가 바라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

    김씨가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그가 고등학생이던 당시에 백혈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이종사촌 동생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김씨는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동생은 나보다 네 살 어렸는데 백혈병으로 인해 투병생활을 했다. 동생이 내게 '오빠가 의사 선생님이 되어 날 치료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때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김씨는 "당시 동생의 의사 선생님은 동생이 괜찮아질 거라고 했는데 갑자기 상태가 나빠졌다. 그리고 동생은 지난 2000년 봄 세상을 떠났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의사 선생님을 원망했다"며 "막상 내가 의사가 되어보니 그때 의사 선생님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고 말했다.

    환자 가족이기도 했고 의료사고도 겪은 의사로서 그가 바라는 환자와 의사의 관계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지금 환자와 의사는 서로를 믿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대리수술, 불법 리베이트 등 환자의 신뢰감을 떨어뜨리는 비윤리적인 행위에 대한 보도가 많았다"며 "의사들이 환자에게 신뢰감을 줄 정도로 의료계가 먼저 윤리적인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료사고 발생시, 의사가 유감에 대한 표현을 자유롭게 할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됐으면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sorry works'(유감표현 면책조항)를 사례도 들었다. 'sorry works'란 의료사고 발생시 의사의 유감표현 행위를 법적인 책임 인정과 구분하는 법이다. 이 법은 미국의 한 환자 가족이 의사로부터 도의적인 사과를 듣고자 제안한 운동에서 비롯됐다.

    그는 "의사들 사이에선 도의적인 유감을 표현하는 일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환자와 보호자는 의사로부터 위로의 말을 듣고 싶은데 의사는 유죄 인정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환자와 보호자를 회피하는 경우가 많다"며 "우리나라에 'sorry works'가 도입되면 환자와 보호자에게도 의사에게도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 내가 의사라는 것을 알게 된 같은 방 사람들이 '자신은 의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왜 의사를 좋아하지 않느냐고 물었다"며 "그들은 오래된 일인데도 각자 의사로부터 느꼈던 권위주의적 태도와 불친절했던 의사에 대한 경험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의사들은 누구보다 환자를 건강하게 하는 일에 책임과 보람을 느낀다"며 "환자들이 병원에서 겪은 불편하고 불쾌한 기억을 가지고 모든 의사들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