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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료계획, 5년 단위 대통령 공약 아닌 15년 장기 미래 사회 준비해야"

    이규식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의료계획 수립과 쟁점' 보고서 통해 밝혀

    "의료계획 없다 보니 과도한 의료이용·병상수 과잉 공급·질적 성장은 외면"

    기사입력시간 2018-05-17 15:18
    최종업데이트 2018-05-17 16:03

    자료=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보건복지포럼 
    [메디게이트뉴스 임솔 기자]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의료를 ‘공공성이 강한 사적 재화’로 간주했다. 정부는 시장으로 접근하면서도 의료계획 없이 정책을 수행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건강보험 제도를 유지하는 한 '필요도' 중심의 의료계획 수립을 서둘러야 한다.”
     
    이규식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명예교수 겸 건강복지정책연구원장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건복지포럼 4월호 ‘의료계획 수립과 쟁점’ 보고서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 교수에 따르면 건강보험제도는 의료를 인간의 기본권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법률에 따라 전 국민에게 강제로 적용한다. 환자는 전체 의료수가가 아니라 일부 본인부담금만 내는 구조인 만큼 시장 가격은 무의미하다. 이 교수는 “의료는 가격에 의미가 없어 시장 수요를 토대로 배분할 수 없다. 시장이 무력화되기 때문에 수요를 대신하는 ‘필요도’를 기준으로 의료를 배분하는 새로운 메커니즘이 요구된다”고 했다. 

    그는 "의료계획이 없다 보니 과도한 의료이용과 병상의 과잉 공급이 문제되고 있다"라며 "의료의 질적 성장과 의료정책 방향 설정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의료계획은 대통령 공약이 아니라 15년 이상의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하고 '건강보험 의료'라는 이념 정립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편, 보건복지부는 이달 1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 보건의료발전계획 수립을 위한 기초 연구 사업 입찰을 공고한 상태다. 
     
    과도한 의료이용과 병상 과잉 공급​…질적 성장과 정책 방향 설정 불가
     

    정부는 2000년에 보건의료기본법을 제정했다. 이 법 제15조에 따르면 5년 단위로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수립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계획 수립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교수는 “정부는 의료계획을 수립하도록 법령을 구비했으나 왜 계획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리를 정립하지 못했다“라며 ”이 조항은 사실상 사문화됐다. 우리나라 의료체계는 시장형 의료체계와 유사한 상태가 됐다”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의료정책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의료보장 정책에 부합하는 의료계획이 왜 필요한지 논리를 정립하고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의료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의료계획이 없어서 발생하는 문제점으로 크게 6가지를 들었다. 첫째, 과도한 의료이용으로 의료체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의료이용률이 외래 세계 1위, 입원 세계 2위로 높게 나타나는 문제가 나타났다.

    이 교수는 “정부나 보험자는 필요한 의료의 범위와 서비스양을 정하고 이를 공급할 계획을 수립하고 관리해야 한다”라며 “현재는 환자 수요에 맡겨 의료이용을 자유롭게 하도록 방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둘째, 의료시설의 과잉 공급을 초래해 의료체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는 문제가 있다.
     
    그는 “의료서비스 가격은 의료공급자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의료서비스 가격이 생산 원가를 충족시키면 서비스의 재생산이 원활하게 이뤄지고, 그렇지 못하면 의료 질을 떨어뜨리게 된다”라며 “가격이 생산 원가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는 공급에 차질이 불가피해진다”라고 했다.
     
    이 교수는 “낮은 수가에서 비급여, 선택진료, 상급병실제도 등 건강보험에서 통제받지 않는 서비스가 존재해 높은 의료이용률을 맞출 수 있는 의료공급이 가능했다”라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인구는 고령화되고 질병은 만성병 중심이 되어 병원을 찾아도 완치가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의료계획이 없다 보니 병상공급량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아졌다“라며 “과다한 병상 증설을 멈추지 않는 한 병상수 과잉은 우리나라 의료체계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셋째, 적정한 의료 인력을 확보하기가 어려운 것으로 지적됐다. 이 교수는 “병원 운영에 필수적인 인력이 의사인데, 의사 공급은 의대 입원 정원으로 통제되고 있다”라며 “반면에 병상 증설은 시장에 맡겨 자유롭게 이뤄지고 있다. 지방 병원은 의사를 구하기 어렵다”라고 했다.
     
    넷째, 의료계획의 부재로 적정한 의료 질 확보도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의료에서 질이란 감염관리나 환자 안전관리를 포함하는 중요한 요소다.
     
    이 교수는 “적정한 의료 질 확보는 의료수가, 의료기술 발전, 개별 의료기관의 명성 등 경쟁력 제고를 위한 경영적인 판단과 적정한 질 확보를 위한 정부의 의지에 달려 있다”라며 “우리나라 의료의 질적 수준은 겉으로 나타나는 것과는 달리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겉으로 나타나는 의료의 질은 경영적 차원에서 소비자들이 많이 찾을 수 있도록 병원을 치장하고 내부를 쾌락하게 꾸미는 수준이다. 소비자들이 알지 못하는 감염관리나 환자 안전 측면은 도외시된다”고 했다. 또한 "적정한 의료 질 확보를 위해 장기적인 계획이 필요하다"라며 "의료 질은 건강보험 심사평가원의 평가 기능만으로 달성할 수 없다. 환자 안전을 위한 의료기관인증제 등의 제도가 뿌리내리려면 장기적인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섯째, 의료체계의 장기 발전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면 고령화 사회를 대비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 이 교수는 “우리나라는 앞으로 7년 후인 2025년 고령화율 20%가 넘는 초고령사회가 될 전망”이라며 “그럼에도 의료체계가 장기적으로 발전해야 할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병원 중심 체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섯째, 의료정책의 투명성과 상황 변화에 따른 탄력성이 없는 것으로 지적됐다. 이 교수는 “의료계획의 부재로 정책 방향 설정이 제대로 되지 않고 정책의 투명성도 결여돼 있다”라며 “전통적인 행정학 이론에 따른 관료제에 따라 의료제도가 운영된다"고 했다.

    이 교수는 "한번 정해진 정책은 문제가 있어도 후임자가 정책을 바꾸려 하지 않고 결정을 미룬다. 상대가치점수나 보험급여 등의 정책이 환경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대통령 공약 아닌 15년 장기계획 세우고 건강보험 의료 정립해야  
     
    그는 의료계획이 갖는 문제점 역시 6가지를 꼽았다. 우선 대통령 선거 공약과의 관계를 들었다. 아무리 정교한 계획을 수립해도 5년마다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의 공약과 다르다면 계획 자체가 사문화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선거 공약은 표를 얻기 위해 동원되는 응급적인 정책이 많다"라며 "의료계획에서 제시된 정책과 상충될 수 있다. 또는 계획을 조기에 달성하려는 공약이 제시돼 계획을 불필요하게 만들거나, 계획 실행에 혼선을 초래할 수 있다”고 했다.
     
    둘째, 계획을 수립하고 서비스가 제공될 때 시차가 존재해 계획의 현실성을 떨어트릴 수 있다. 이 교수는 “의료계획에 따른 인력계획은 의사 인력이 현장에 투입돼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데 대략 10년의 시차가 있다"라며 "계획이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셋째, 의료기술의 변화 속도가 계획을 앞설 때의 문제다. 이 교수는 “의료계획으로 투자되는 시설이나 자본재는 변화 속도가 빠를 수 있다. 이 때 계획의 유용성이 떨어진다”고 했다.
     
    넷째는 지역과의 갈등, 다섯째는 이해단체와의 갈등을 들었다. 이 교수는 “의료계획이 지역의 이해와 달라지면 계획의 수립은 물론 실행에도 어려움을 겪는다”라며 “의료계획이 새로운 병원 건립을 반대한다면 병원 건립 을 희망하는 지역 경제 활성화에 역행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해단체(의사회, 간호사회, 약사회 등)의 이해와 의료계획이 지향하는 방향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이해단체의 반대에 봉착하면 계획의 수립이 어렵다. 계획이 수립되더라도 실행에 어려움을 겪는다”라고 했다.
     
    이 교수는 “예를 들어 의사 인력의 증원이 의료계획에 포함되면 의사단체의 반대에 부딪힌다. 지역 단위로 의료와 요양(돌봄)서비스의 통합 제공이 등장하면 사회복지 관련 단체의 반대가 나올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제대로 된 계획 수립이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여섯째, 의료정책과 관련된 이념적 반대의 문제를 들었다. 이 교수는 “지역사회 중심의 의료 체계를 실행하려면 1차의료 의사와 환자 가정 간 원격의료가 필수적이다. 그런데 원격의료라는 말만 나오면 '의료민영화'라는 이유로 반대가 나오고 있다"라며 "제대로 된 의료체계를 설계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의료계획과 대통령 선거 공약의 관계는 의료계획이 부딪히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 15년 계획의 ‘미래를 위한 장기 의료구상’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장기 구상은 5개년 계획과는 달리 세부적인 내용을 계획하는 것이 아니다. 향후 15년간 우리 사회가 직면할 고령화, 만성질병, 저성장 경제 등의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장기 전략에 중점을 두게 된다. 이는 공약과 의료계획을 조정할 수 있다”고 제시했다.
     
    예컨대 2017년 영국 상원(House of Lords)의 NHS(국가보건서비스) 지속가능위원회는 NHS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단기적 성과주의를 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5~20년 앞을 내다보는 장기 전략의 필요성이 부각됐다.
     
    이 교수는 “계획과 서비스 제공 간의 시차 문제나 의료기술 발전의 속도가 빠른 문제는 다른 나라도 닥칠 수 있다”라며 “이에 따라 의료계획의 내용을 너무 세부적인 과제까지 다룰 필요가 없다. 의료계획에서 정책의 비전과 목표, 정책 방향을 제시해 정책이 융통성을 갖고 대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고 했다. 

    이어 "지역이나 이해단체의 반대, 논리적 근거 없이 의료민영화 등의 이념적 반대에 대해서는 의료보장제도에서 의료계획의 불가피성을 알려야 한다. '건강보험 의료'라는 이념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 교수는 “정부는 건강보험 의료를 사적 재화로 간주하지 말아야 한다”라며 “지역이나 이해단체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 의료계획의 최종 결정은 복지부가 아닌 국무회의를 거치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