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이지원 기자] 연명의료결정법이 시행된 지 7년이 지났지만, 의료현장에서는 여전히 무의미한 연명의료가 반복되고 있다. 이 배경에는 법적 책임을 우려한 의료진의 방어진료와 본인부담이 낮아진 환자·보호자의 의료집착 등이 있다.
서울의대 내과학교실 허대석 명예교수는 29일 2025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학술대회에서 '응급의료에서의 연명의료결정과 완화의료'를 발표하며, 기존의 기술 중심 의료체계에서 벗어나 환자의 가치와 삶을 중심에 두는 의료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연명의료결정법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도록 규정돼 있지만, 현장에서는 가족의 반대, 병원 시스템 미비, 의료진의 법적 책임 우려 등으로 인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허 교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에도 인공호흡기 적용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자살 기도한 사례 등을 소개하며 "환자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고 전산등록까지 마쳤음에도, 가족의 반대와 요양병원의 시스템 미비로 무의미한 연명의료가 이어지는 상황이 많다"고 설명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9세 이상의 사람은 누구나 작성 가능하다. 허 교수에 따르면 올해 5월 기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한 사람은 290만명에 달한다. 이 중 60세 이상 노인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노인인구를 1000만명으로 설정했을 때 약 30%의 노인이 사전연명의료의약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는 자신이 향후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되었을 때를 대비해 연명의료 및 호스피스에 관한 의향을 문서로 작성할 수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보건복지부의 지정을 받은 등록기관을 방문해 설명을 들어야 한다. 등록기관을 통해 작성·등록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연명의료 정보처리시스템의 데이터베이스에 보관되며, 법적 효력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연명의료정보처리시스템을 통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와 연명의료계획서를 확인·이행할 수 있는 기관은 대상 기관 중 25.3%에 불과하다.
요양병원 대부분은 윤리위원회를 구성하지 못해 연명의료결정법을 적용하기 어렵다. 실제로 등록기관으로 인정된 요양기관은 대상기관 1334개소 중 166개소(12.4%)에 그친다. 상급종합병원은 모두 등록기관으로 인정되며, 종합병원은 대상기관 330개소 중 220개소(66.7%)가 등록됐다.
결국 환자는 상급종합병원이나 종합병원에서 생을 마감해야만 이 법을 적용받으며, 이에 따라 환자는 임종기에도 비싼 의료장비를 동원한 연명의료를 받아야 한다.
이어 허 교수는 무의미한 연명의료는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고 밝혔다. 특히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과 정부의 보장성 강화 정책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보라매병원 판결 이후 연명의료결정에 법적 개입이 시작되면서 의료진은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 방어진료를 강화했다. 한국은 말기와 임종기를 구분해 연명의료를 결정하는 유일한 나라다. 일본은 말기와 임종기의 연명의료결정을 허용한다. 영국과 독일 대만 등은 식물상태 및 치매까지 허용하며, 스위스와 미국 10개주는 의사조력자살,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캐나다, 호주 등은 적극적인 안락사까지 허용한다.
또한 정부의 보장성 강화 정책은 환자 본인 부담금을 낮춰 가정 내 돌봄보다 병원 진료가 경제적으로 유리하게 만들었다. 이 외에도 '죽음조차 극복할 수 있다'는 인식과 연명의료에 대한 기대감이 의료 집착적 문화를 형성했다.
허 교수는 "임종기 환자의 연명의료 여부를 기술적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환자의 삶의 맥락과 가치관에 기반해 결정이 이뤄져야 한다"며 "실제로 동일한 환자에 대해 연명의료 여부를 판단할 때, 담당 레지던트와 보호자의 판단이 일치할 확률은 40%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이는 기술적 기준만으로는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임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허 교수는 의료 시스템이 환자의 삶의 질과 돌봄을 중심으로 재편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치료(cure)'에서 '돌봄(care)' 중심으로 정책 방향을 전환하며, 지역사회 중심의 의료-돌봄 통합 체계를 시도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대형병원과 기술 중심의 구조에 편중돼 있다.
이에 허 교수는 "기술 중심 의료로는 회생 가능성이 낮거나 회복이 어려운 말기 환자의 삶을 존중할 수 없다"고 지적하며 "의료의 패러다임이 기술 중심에서 가치 중심으로 전환돼야 한다. 반복 재입원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유전자 검사나 고가 의료기술이 아니라 '돌봄 계획(케어플랜)' 수립"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호스피스 완화의료는 단순히 의료비 절감 수단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을 존엄하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체계"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의 호스피스 제도는 암 등 일부 질환만 제한해 적용하며, 전체 임종 환자 중 실제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는 비율은 10%에 불과하다.
허 교수는 "법이 모든 상황을 따라갈 수는 없다"며 "회생 가능성에 대한 판단은 동료 의료진 간의 컨센서스를 기록으로 남기고, 그 안에서 환자의 가치를 중심에 두는 판단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