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우리나라 섬 주민 약 81만명의 의료접근성을 떠받치고 있는 병원선이 법적으로는 의료기관도, 지역보건의료기관도 아닌 채 각종 제도 밖에 놓여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비대면진료, 보건의료정보시스템, 보험·안전, 유류비 면세 등에서‘무국적 진료실’처럼 취급받으면서 공중보건의사와 지방자치단체가 위험과 비용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입법조사처는 15일 발간한 '섬 주민을 찾아가는 병원선(Hospital Ship), 법·제도 공백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보고서에서 “병원선은 섬 지역 주민의 의료접근성을 보완하는 중요한 공공보건의료 자원이지만, 현행 법체계상 의료기관 또는 지역보건의료기관으로서의 법적 지위를 갖고 있지 않다”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병원선을 지역보건의료기관·건강보험 요양기관·국가건강검진기관에 포함하는 등 입법·재정 과제가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유인섬 480개·주민 81만명…‘마지막 안전망’ 병원선
2024년 말 기준 우리나라에는 총 3390개의 섬이 있으며, 이 가운데 주민등록 인구 1명 이상이 거주하는 유인섬은 480개, 무인섬은 2910개다. 유인섬에는 약 81만명이 살고 있어 전체 인구의 1.59%를 차지하지만, 이 중 약국을 제외한 보건의료시설(보건지소·보건진료소)이 있는 섬은 192개에 불과하다.
보건의료시설이 전혀 없는 288개 유인섬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은 곳은 충남 태안군 신진도로, 주민 840명이 이용할 수 있는 의료자원은 약국 1곳뿐이다. 고령화로 만성질환 관리 수요가 커지는 가운데 응급상황 시 육지 의료기관 접근이 제한돼 섬은 대표적인 의료취약지로 꼽힌다.
이런 여건에서 병원선은 육지에서 출항해 섬을 순회하며 내과·치과·한의과 진료와 건강관리, 방문진료 등을 제공하는 ‘찾아가는 공공보건의료’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현재 경남·전남·인천·충남 등 4개 광역자치단체가 모두 5척의 병원선을 운영하며 섬 주민의 의료접근성을 보완하고 지역 공공보건의료체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각 병원선은 적게는 17개, 많게는 90개 섬을 진료대상으로 삼는다. 경남·충남은 섬별 월 1회 이상 정기순회 진료를 하고, 섬이 특히 많은 전남은 연 4회 순회 진료를 실시한다. 최근 1년(2025년 실인원 기준) 동안 최소 5000명에서 최대 2만5000명까지 섬 주민에게 진료와 검사를 제공한 것으로 집계됐다.
“의료법상 의료기관도, 지역보건법상 기관도 아니다”
문제는 이처럼 실질적으로 진료와 처방을 수행하고 있음에도 병원선이 현행 법체계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병원선은 상위법 없이 복지부 훈령과 지자체 조례에만 근거해 운영되고 있어 지역보건법상 지역보건의료기관에도, 의료법상 의료기관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보고서는 이로 인해 비대면진료와 정보시스템, 법적 보호에서 여러 한계가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우선 자연재해나 기상 악화 등으로 병원선 운항이 불가능한 경우 만성질환자 약 처방 등을 위한 비대면진료 필요성이 있지만, 병원선에는 이를 허용하는 법적 근거가 없다.
2025년 12월 의료법 개정으로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의원급 의료기관과 보건소·보건지소에서의 비대면진료가 제도화됐지만, 법적 지위가 없는 병원선은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또 지역보건의료정보시스템(PHIS)과의 연계도 막혀 있다. 보건소·보건지소·보건진료소는 PHIS를 통해 보건행정과 진료·통계를 관리하지만, 병원선은 법적으로 지역보건의료기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시스템을 사용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보건소·보건진료소와의 환자정보 교류가 차단되고, 각 시·도가 별도 정보시스템을 예산을 들여 구축·운영해야 하는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승선 주민 법적 지위 불명확…보험 사각지대 우려
병원선은 선박안전법에 따라 관리·운영되며, 시행규칙은 선원과 동승해 생활하는 선원 가족이나 시험·조사·지도·점검·실습 목적 승선자를 ‘임시승선자’로 지정해 최대승선인원 규정을 적용하고 있다.
국가 또는 지자체 소유 선박이 응급환자·산불 진화 인력을 수송하는 경우에는 별도 승인 없이 최대승선인원 규정을 완화할 수 있지만, 일상 진료를 위해 병원선에 오르는 섬 주민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특히 병원선이 접근하기 어려운 작은 섬이나 얕은 해안에서는 보조정이 병원선과 섬을 오가며 환자와 의료진을 이송하는데, 이 과정에서 주민의 법적 지위와 보험 적용 범위가 불명확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보고서는 “병원선 탑승과 보조정 이용에 대한 법적 근거가 없어 선박보험에 일반 주민이 포함되는지 여부가 명확하지 않고, 사고 시 보상 범위를 둘러싼 분쟁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국제법상 병원선은 부상자와 환자의 치료 및 후송을 목적으로 병상·수술실·전문 의료인력을 갖춘 선박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지자체가 운영하는 병원선은 외래 중심의 기초진료와 건강증진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보고서는 “엄밀한 의미의 병원선이라기보다 ‘이동형 보건지소’ 또는 ‘순회 진료소’에 가까운 성격”이라고 평가했다.
그동안 정책의 초점도 선박 교체와 장비 보강 등 시설·설비 개선에 맞춰져 왔을 뿐, 섬 지역 의료체계 내에서 병원선이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부족했다.
실제로 2024년 경남 통영시 사량면에서는 의약분업 예외지역 해제로 병원선의 투약 기능이 제한되면서 운항 중단이 검토됐다가, 도서지역 의료접근성을 고려한 보건복지부의 예외 적용 인정으로 가까스로 운항이 유지된 사례도 있었다.
보고서는 “섬 지역 의료서비스는 병원선뿐 아니라 보건지소, 약국 등 다양한 자원 연계를 통해 제공된다는 점에서 병원선의 역할을 지역 의료체계 전반의 관점에서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이어 "병원선이 섬 주민을 대상으로 진료와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보건의료 자원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지역보건법 개정을 통해 병원선을 지역보건의료기관의 일종으로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국민건강보험법상 요양기관으로 지정해 요양급여를 실시할 수 있도록 하고, 건강검진기본법을 개정해 병원선에서 국가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