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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화 된 의료(Organized medicine)와 조직화가 더 요구되는 의사 사회

    의사는 전문직이지 정권에 악용되는 ‘공공재 하인’이 아니다

    [칼럼] 안덕선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장·고려대 명예교수

    기사입력시간 2024-07-22 06:14
    최종업데이트 2024-07-22 06:14

    영국 의사들의 파업 장면.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우리가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의료전달체계’, ‘보건의료 체계’, ‘의료제도’와 같은 용어는 ‘Health Care’, ‘Healthcare’, ‘Healthcare System’, ‘Healthcare Delivery System’, ‘Health System’ 등 다양한 형태로 혼용된다. 너무나도 흔히 사용하는 의료제도라는 기표(signifiant)는 현대의학에서 ‘조직화된 의료(Organized medicine)’라는 매우 복잡한 기의(signifie)를 품고 있다. 
     
    오늘날 현대적 개념의 병원이 출현하게 된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세상의 변화는 전쟁, 재난, 혁명 등 여러 가지 돌출하는 상황과 이에 맞물린 매우 복잡한 이유로 가속화한다. 산업혁명과 근대화 과정, 그리고 제1, 2차 세계 대전을 경험하며 보다 선진화된 사회의 의료 변천은 곧 조직화 된 의료의 방향으로 진화과정을 밟아 왔다.  

    현대적 개념의 ‘의(醫)·식·주’ 의료가 핵권리로 부상

    현대 국가에서 의, 식, 주와 더불어 의료도 국민의 명확한 기본권의 하나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데 의료가 본격적으로 조직화 되기 전에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지극히 사적인 계약관계였다. 환자는 자신의 의지로 의사를 선택할 권리를 갖고 있었고, 치료의 선택이나 비용에 대한 최종 합의도 의사와 환자 간의 사적 관계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근, 현대를 거치며 의료가 발달함에 따라 의료비는 환자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상승하면서 상호부조를 통한 의료공제조합이 만들어지게 됐다. 

    프랑스는 현재 의료비를 조세주의에 의한 사회안전제도와 비보험을 위한 ‘보충 보험(mutuelles)’ 형태의 이중 구조를 갖고 있는데, 현재의 우리나라 운영 형태와 비슷하다. 뮤츄엘(Mutuel)은 상호공제조합으로 19세기에 출발했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질병이나 부상에서 발생하는 재정적 지원과 그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노동자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공제조합을 출범시킨 것이다. 공제조합은 필요할 때 혜택을 제공할 수 있도록 회원의 회비로 기금을 마련해 상호 연대의 원칙에 따라 운영됐다고 한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상호공제조합은 건강보험보장을 포함하도록 서비스 영역을 확장했다. 이후에 서비스 내역이 더 세분화되고 공식화돼 의료비, 입원, 약품 보장과 같은 특정 건강 관련 혜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권리도 찾아서 실행할 때 본연의 권리로 강한 보호막 생성  

    이에 맞물려 의료소비자들이 모여 의료상호공제조합을 만들고 자신들의 이익과 권위를 강화함에 따라 의사들도 종래의 환자 의사 간의 사적 관계에서 공제조합과 단체적인 협상을 위한 조직이 필요하게 됐다.

    프랑스 최초의 의사조노(The Union of French Medical Syndicates:USMF)는 1880년대 설립됐다고 한다. 의료상호공제조합이 탄생한 시기에 프랑스 의사들은 상호공제조합에 대항해 의사의 이득과 배타적인 의료 독점권을 위해 의사노동조합을 탄생시켰다. 이미 1884년에 프랑스 74개 지역 노조가 연합해 전체 의사의 20%에 육박하는 3500명의 회원을 보유했다고 한다. 

    USMF는 1919년 1차 대전 종료 직후 프랑스의 사회보험에 대한 반대입장을 표명했고, 1920년 대정부 파업에 나섰다고 한다. 프랑스는 1928년과 1930년 고용주와 직원이 질병, 출산, 장애 및 노령을 보장하는 보험 기금에 기여하도록 법에 명문화했다. 프랑스 의사노조는 전통적인 의사 환자 관계에서 의사와 환자 이외 제3자 간섭을 배제하는 원칙을 고수했다. 프랑스 노조는 1928년에 Confederation of French medical unions(CSMF)로 재탄생했고, 노조 헌장에 ‘자유 의료(liberal medicine)’ 추구를 명시했고 현재도 그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한다. 

    의료 체계와 공급자 권리가 동반 성장해야 부속품 전락 면해 

    영국은 산업혁명과 세계 1차 대전으로 전례 없었던 환자 급증 사례를 경험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새로운 의료제도에 대한 요구로 당시 왕실 주치의였던 영국의 저명한 의사인 베트랑 에드워드 다우손(Bertrand Edward Dawson)은 1919년 보건부의 ‘체계화된 의료 서비스 제공 자문위원회’ 의장을 맡고 이듬해인 1920년에 Interim Report On The Future Provision Of Medical And Allied Services를 출간했다. 이 미래 의료에 대한 보고서는 향후 의료기관을 단일 시스템으로 연결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의료의 조직력 부족으로 의학 발전의 대국민 접근 문제가 존재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근거로 이른바 ‘조직화 된 의료’의 본격적인 시대를 예고했다. 

    미국도 사정은 비슷했는지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1901~1909) 대통령도 20세기에 들어선 미국에서 의료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국민이 아프거나 가난하면 강한 나라가 될 수 없다(No country could be strong whose people were sick and poor)”는 확신에 찬 주장을 폈다. 미국도 산업혁명의 여파로 산업재해, 근로자 부상 증가를 가져왔고 근로자 권익 보호를 위한 노조의 발달도 가져왔다. 1차 세계대전을 전, 후로 1910~1920대 미국은 일반 시민이 감당하지 못할 의료비가 사회적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다.

    1923년 달라스의 베일러 병원(Baylor Hospitals)은 지역 학교 교사와 협력해 월정액을 선불 납입하는 의료 서비스 제공의 보험 형태가 인기였고 곧 전 세계의 학교로 확대됐다. 종국에는 미국의 비영리 의료보험인 ‘Blue Cross/Blue Shield’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서 비영리 의료보험의 출현에 민간 보험사들이 이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다수의 보험사들이 의료 시장에 진입하도록 속칭 ‘사업적인 영감’을 부여했다고 한다. 

    집단지성과 정치력을 키워야 전문직업성도 보존이 가능   

    유럽과 미국의 근현대사에서 이미 19세기부터 의료가 제도화, 체계화를 추구하며 조직 의료(Organized medicine)로 진화되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다. 환자들도 이미 약 130여 년 전 자신들의 이권 보호를 위해 상호공제조직을 만들어 현대적인 의료보험의 초석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결국 영국은 1, 2차 세계 대전을 경험하며 1948년 국가 전체의 의료를 담당할 국가보건시스템(National Health System)을 창설했고, 이를 지켜본 프랑스도 드골 장군에 의하여 의료가 포함된 사회안전제도(Social Security System)를 출범시킨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의사 집단인 영국의사회(British Medical Association)도 1975년에 자신들의 집단 정체성으로 전문직협회(Professional Association)와 동시에 의사노조(Trade Union)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의사의 권익 보호와 더불어 대표적인 조직 의료 형태인 NHS에 대항할 수 있는 ‘보건 정치(Health Politics)’가 그들에게는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현대의 조직화된 의료를 의미하는 ‘의료제도’라는 단순한 용어의 깊은 행간에는 의사 집단의 조직화가 필요함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다. 종래의 의사 환자 간의 관계도 훨씬 더 복잡한 관계로 변천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조직 의료가 나라의 공식화 된 제도로 정착하면서 의사와 국가 간의 관계도 이에 상응하는 관계 설정이 필요한데도 관료주의가 전문화 주의를 짓밟고 우선하는 우리나라는 의사 집단의 조직화에 대한 발달 지연 현상을 보인다. 

    의사는 전문직이지 정권에 악용되는 ‘공공재 하인’ 아냐 

    개인주의가 강한 서양 의사들이 정부의 조직 의료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권익 보장을 위한 조직으로 그 위상과 세력을 진화시키고 발달시켰다. 반면 집단주의가 강하다는 아시아의 문화가 역설적으로 의사 집단의 조직화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은 딱히 뭐라고 설명하기가 매우 힘든 역설적인 모습이다. 그동안 우리나라 의료계는 짧은 기간 동안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 보장성 강화와 의료기술의 선진화에 몰두하고 성공했다.

    그러나 이제는 기술의 발전을 넘어 서양의학의 기원 국가에서 발달시켜온 의사 집단의 조직화 과정에 대한 집단적 학습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 의사 개개인의 조직화와 집단화로 소비자, 정치권, 그리고 정부의 불합리하고 과도한 요구를 이성적으로 조절 통제하고 맞설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의사 전문직업성 수호의 중요한 역량이 된 것이다. 의사는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직(Service provider)이지 정권이나 공무원의 통제하에 있는 공공재 하인(Servant)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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