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들이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는 게 구세주가 아니라 정체성의 몰락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의협 의료정책연구소는 5일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주제로 제42차 의료정책포럼을 열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28일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의 건의를 토대로 규제 개선과 일자리 창출이라는 미명 아래 카이로프랙틱 자격 및 문신사 합법화,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 및 한방보험 적용 확대 추진 등의 규제개선과제(기요틴)를 발표한 바 있다.
그러자 한의협 김필건 회장은 최근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은 국민의 건강 증진과 불편 해소, 한의학의 과학화를 통한 한의약 산업 발전을 이룰 수 있는 보건의료분야 규제 기요틴의 핵심이자 상징"이라고 단언했다.
특히 김 회장은 "관련 법류의 미비와 왜곡된 판례로 인해 사용을 제한받아온 초음파, 엑스레이라는 손톱 밑 가시를 뽑아내기 위해 시작된 규제개혁이 도를 넘어선 이익단체의 갑질, 이에 굴복한 복지부에 의해 의미가 변질돼 오히려 우리를 단두대에 올리고 있다"며 단식에 들어갔다.
현대의료기기에 대한 법원의 판례
이날 의협 한방대책특위 박광재 위원은 현대의료기기와 관련한 법원의 판례를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은 2008년 10월 한의사가 진단용 방사선 발생장치를 이용해 성장판검사를 하는 것은 한방의료행위가 아니라고 판시했다.
서울고법은 2006년 6월 한의사의 CT 사용 역시 한방의료행위에 포함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결을 선고했다.
헌법재판소는 "한의사가 초음파기기를 사용해 진단하는 행위는 면허된 것 이외의 의료행위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어서 의료법 위반 혐의가 인정돼 한의사에 대한 기소유예처분이 정당하다"고 못 박았다.
다만 헌재는 2013년 12월 "안압측정기, 자동안굴절검사기, 세극등현미경, 자동시야측정장비 등은 신체에 아무런 위해를 발생시키지 않고, 측정결과를 한의사가 판독할 수 없을 정도로 전문적인 식견을 필요로 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정했다.
정부는 헌재의 이같은 결정에 따라 한의사들이 사용할 수 있는 현대의료기기의 범위를 재조정할 방침이다.
이에 대해 박광재 위원은 "헌재의 판결은 심리과정에서 의협이나 안과학회, 이비인후과학회 등 전문가단체의 의견을 전혀 거치지 않은 절차적 공정성이 결여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의료법에서 정한 면허증을 무시하고 대충 공부해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한다고 우긴다면 나라의 기틀이 무너지고 국민의 안전은 지킬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환기시켰다.
의료계의 입장
의협 의료정책연구소 이평수 연구위원은 "이원화된 면허체계에서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은 의료체계 붕괴를 초래할 수 있고, 전문성 결여로 인해 국민 건강에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의협의 입장은 한의학의 현대화, 과학화는 한의학적 원리에 따른 한방의료기기를 이용해야 하며,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은 의료일원화 이후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한병원협회 정영호 정책위원장은 헌재의 결정 요건에 부합하는 의료기기들을 빠른 시간 안에 한의사의 사용범주로 확대하는 것은 많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 위원장은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기본체계와 이론, 적용범위 등이 서로 다른 현실을 감안하더라도, 한의사의 사용범위를 무분별하게 확대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의학-한의학 간의 경계를 부분적으로 허물어 각 의학의 고유한 성질과 이론체계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신중한 접근과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면 서울대 보건대학원 조병희 교수는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했다.
조 교수는 "한의사들이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려는 것은 경제적 이해관계나 환자유치 등의 목적도 부분적으로 있을 것이지만 크게 보면 한의학 자체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는 과정에 있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90년대만 해도 한의사들은 서양의학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민족의학 담론을 주장하고 의료일원화를 거부했는데 요즈음의 한의사들은 의료일원화에 대한 거부감이 크지 않고 서양의학의 장점을 수용하는데 적극적"이라고 설명했다.
한의사들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은 의료일원화 또는 의료통합으로 가는 중간단계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게 조 교수의 주장이다.
조 교수는 "의사들은 한의사들의 '의사노릇'에 대해 경계하고 있지만 이를 제도적으로 허용하면 오히려 어설픈 의사노릇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현대기기 사용 과정에서 정말로 한의학적인 장점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하면 현대기기는 한의학의 구세주가 아니라 오히려 한의학의 정체성의 몰락을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