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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수 후보 "동료 의사들이 삶의 원동력, 봉사와 헌신의 자세로 24시간 열려있는 리더"

[의협회장 후보자가 살아온 삶③] 흉부외과 전공에서 사명감과 책임감 배워...필수의료 공약 강조

기사입력시간 21-02-23 05:02
최종업데이트 21-02-23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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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대 대한의사협회 회장 선거에 도전한 기호3번 이필수 후보는 누구보다 먼저 행동하고 베푸는 삶에 익숙하다. 사진은 2016년 전국의사대표자궐기대회 당시 이필수 후보의 모습.
제41대 대한의사협회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온 이들일까. 어린시절 꿈은 무엇이었고 왜 의사가 됐을까. 의사로서의 삶에서 언제 가장 보람있고 또 힘들었을까. 그리고 어떤 계기로 의협회장 출마까지 결심하게 됐을까. 메디게이트뉴스는 후보자 6명의 인터뷰를 통해 각자의 성장배경과 가치관 등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①임현택 후보 "부당함 해결에 말보단 행동, 권력자에 더 강하게"
②유태욱 후보  "세상을 더 크고 넓게 바라보는 의사”
③이필수 후보 "봉사와 헌신의 자세로 24시간 열려있는 리더"
④박홍준 후보 "환자뿐만 아니라 상처 입은 동료 의사들 치료하고파"
⑤이동욱 후보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의료계 바꿀 것"
⑥김동석 후보 "모가 나도 찌르지 않고 빛이 나도 눈부시지 않게"

[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누구나 어렸을 적, 세상을 구원할 '히어로(Hero)'를 꿈꾸곤한다. 제41대 대한의사협회 회장 선거에 도전한 기호3번 이필수 후보도 비슷했다. 그는 여수 시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치료비가 없어 제때 병원을 가지 못하는 동네 어르신들을 보고 자랐다. 지금도 그는 어렴풋이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회상한다.

이 후보가 의사의 꿈을 가지게 된 것은 친구의 아버지가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을 것을 목격하면서부터다. 

그에게 히어로는 머나먼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남을 돕고 먼저 베푸는 주변의 따뜻한 이웃들이 그에겐 히어로였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도 컸다. 아버지는 어렸던 이필수 후보에게 항상 어려운 환경에 처한 이들을 돕고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이 후보가 흉부외과를 전공의로 선택한 이유도 비슷하다. 전남의대를 졸업하고 1987년 마산고려병원(현 창원삼성병원)에서 인턴생활을 시작했는데 경남권에서 당시 꽤나 크고 힘든 병원이었다.

그는 "당시 교통사고로 인한 외상환자가 굉장히 많았다. 흉부외과 선배 의사들이 능숙하게 바이탈을 잡고 응급치료를 하는 모습, 다 죽어가던 환자가 살아나는 과정이 너무 감동스러웠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나주종합병원에서 공중보건의사로 흉부외과 과장 재직시절. 사진=이필수 후보 제공 
이 후보는 죽어가는 환자를 살리는 일이 자신의 천직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만큼 긴장의 연속이었고 사명감이 필요한 일이었다. 당시 정신적으로 힘들 때마다 그는 창원삼성병원 유병하 교수에게 흉부외과 의사로서 책임감과 헌신, 삶을 배웠다.

이 후보는 "지금 생각해보면 유병하 교수의 나이는 많아봐야 30대 후반 정도로 나와 10살 정도 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그런데 흉부외과 의사가 갖춰야할 봉사와 헌신, 강한 정신력을 모두 갖춘 분이다. 전문의를 취득한지 벌써 3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장 존경하는 선배"라고 전했다. 

흉부외과 의사를 천직처럼 생각했지만 전공 선택을 후회한 적도 있다. 막상 전문의가 됐지만 흉부외과 의사가 나설 수 있는 봉직 자리는 턱 없이 부족했다. 그는 "당시에도 흉부외과는 교수직 외에는 일할 자리가 없었다"며 "개원을 하더라도 고혈압, 당뇨병 등 만성질환을 돌보는 일반의사로 살아야 했다. 전공을 살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 아쉬움은 공약에 넣었다. 그는 "공약 중 하나가 필수의료를 살리겠다는 것이다. 기피과, 의료취약지 문제는 공공의대를 짓고 의대정원을 늘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며 "전공의들이 세상에 나왔을 때 충분한 일자리를 얻고 적절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먼저 마련해줘야 한다. 민간병원 필수의료과 지원부터 강화하는 것이 첫 걸음이 될 것"이라고 피력했다.   
 

삶의 모토처럼 여겨온 봉사와 헌신의 자세는 그의 삶으로 드러났다. 1999년 전남 나주시의사회 총무이사를 시작으로 의사회에서 회원들의 고충을 듣고 회무를 시작했다. 그는 "보수가 거의 없었고 돈을 바라고 시작했다면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도 살리고 내 주변에 고충을 겪고 있는 동료 의사들을 직접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항상 열려 있는 사람이었다. 2015년 전라남도의사회장 선거 당시 공약도 '24시간 휴대전화를 오픈해놓겠다'는 것이었다. 언제든 민원이 생기면 직접 나서 문제를 해결하고 24시간 내에 응답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이 후보는 "정말 열심히 했다. 회원의 옆에서 누구보다 먼저, 가장 열심히 도왔다. 그 결과로 6년동안 전라남도의사회는 회비납부율 톱을 찍었다. 현재도 95%를 넘는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는 얼마 되지 않는 회장 판공비로 소속 회원들 경조사를 직접 챙긴다. 조직에 대한 열정도 중요하지만 그들과의 신뢰와 소통도 함께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가 생각하는 리더의 자질은 화합이다.

이 후보는 "회장이라고 남들보다 위에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다. 겸손한 자세로 회원들을 오히려 모시는 자리가 회장"이라며 "현재 의료계는 어느 때보다 분열돼 있다. 화합을 가장 중요한 회무로 생각할 것이다. 현재 다른 후보 캠프라도 유능하다면 함께 가고싶다. 이것이 내가 네거티브 선거유세를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다"라고 설명했다.   

끝으로 그는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20년간 개원을 하면서 수입이 좋았던 적도 있지만 지역의사회장을 맡으면서부터 수입은 반으로 줄고 의사 회원들이 먼저가 됐기 때문이다.

이 후보는 "전라남도의사회장이 되면서 시간을 내기 위해 병원을 접고 요양병원 봉직의로 들어갔다"며 "가족들에게 미안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먼저 베푸는 삶을 살기위한 선택이었다"고 전했다. 그는 "지금은 가족들이 가장 큰 조력자가 됐다. 아내와 두 딸이 제일 많은 응원을 해준다"며 "가족들에게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맙다"고 말했다. 

특유의 환한 미소를 보이며 이 후보는 끊임없이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삶의 원동력으로 가족 외에도 동료 의사들을 꼽았다. 이제는 환자들만의 히어로를 넘어 힘들고 지친 동료들을 섬기며 격려하고 함께 나아가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