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이지원 기자]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예방교육에서 감염인에 대한 낙인을 줄이되, 감염 경로와 위험 행동에 대한 의학적 사실은 더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의료윤리연구회는 11일 'HIV/AIDS의 통계적 진실'을 주제로 모임을 열고, 국내외 HIV/AIDS 통계와 예방교육의 과제를 논의했다. 이날 발표는 임수현 원장(현 비뇨기과, 성과학연구협회 부총무)이 맡았다.
임 원장은 발표에서 "HIV와 AIDS는 더 이상 공포만으로 말할 질환은 아니지만, 단순히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이라는 표현만으로 덮어둘 문제도 아니다"며 국내외 통계와 감염 경로, 예방정책의 한계를 짚었다.
그는 HIV와 AIDS의 개념을 구분하며, HIV는 후천성면역결핍증을 유발하는 바이러스이고 AIDS는 HIV 감염으로 면역 기능이 심각하게 저하돼 기회감염이나 특정 암 등 AIDS 정의 질환이 나타나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치료제를 꾸준히 복용하면 AIDS로 진행하지 않고 관리될 수 있지만, 진단이 늦거나 치료가 중단될 경우 질병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HIV 신규 감염, 뚜렷한 감소세 없어…'1000여명' 정체에 예방교육 실효성 점검 필요성 ↑
임 원장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 세계 HIV 감염인은 약 4000만명으로 추정된다. 신규 감염자는 약 130만명, AIDS 관련 사망자는 약 63만명으로 집계됐다.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 발전 이후 사망자는 감소했지만, 신규 감염은 130만명 수준에서 정체돼 있다.
지역별로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감염 규모가 여전히 크지만, 동유럽·중앙아시아, 라틴아메리카, 중동·북아프리카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신규 감염 증가세가 확인됐다. 이에 임 원장은 치료와 관리가 발전했더라도 예방정책이 실제 감염 경로와 위험 행동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면 신규 감염 감소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 신규 HIV 감염인은 2024년 975명으로 보고됐다. 이는 전년 대비 3.0% 감소한 수치다. 이 중 내국인은 714명, 외국인은 261명이다.
내국인 신규 감염자 중 남성은 683명으로 95.7%를 차지했고, 내국인 남녀 성비는 22대 1로 제시됐다. 연령별로는 20~40대 비중이 80.5%로 높았으며, 감염경로 응답자 기준 성접촉에 의한 감염이 99.8%를 차지했다. 이 중 동성 간 또는 양성 간 성접촉은 63.7%에 달했다.
임 원장은 "국내 신규 감염자는 최근 10년간 연평균 1000명 안팎에서 뚜렷한 감소세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코로나19 시기 일시적으로 감소한 수치에 대해서는 “실제 감염 감소라기보다 검사와 진단 접근성 저하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임 원장은 이 같은 국내 통계가 신규 감염 감소를 위한 예방교육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특히 성접촉에 의한 감염 비중이 높게 나타나는 만큼, 예방정책도 실제 감염이 발생하는 경로와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봤다.
항문성교·켐섹스·미진단 감염…위험 행동 교육 강화해야
임 원장은 감염경로 통계를 해석할 때 자발적 응답과 무응답의 한계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통계를 특정 정체성의 문제로 단순화하기보다 실제 전파 위험을 높이는 행동과 네트워크 구조를 구분해 설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HIV 전파를 지속시키는 요인으로 항문성교, 콘돔 미사용, 다수 파트너, 동반 성매개감염병, 약물 사용을 동반한 성행동, 온라인 기반의 불특정 만남 등을 제시했다. 특히 항문성교는 해부학적 특성상 점막 손상과 출혈이 발생하기 쉬워 감염 위험이 높아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임 원장은 "위험 행동에 대한 정보를 말하는 것은 특정인을 낙인찍기 위한 것이 아니라 감염을 예방하기 위한 의학적 설명"이라며 "정체성이 아니라 실제 감염 위험을 높이는 행동과 환경을 정확히 설명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 HIV 역학에서 주목되는 약물 복용 후 성관계, 이른바 '켐섹스(Chemsex)'도 쟁점으로 다뤄졌다. 임 원장은 켐섹스가 다수 파트너, 장시간 성행위, 그룹 성행위, 콘돔 사용 감소와 연결될 수 있으며 HIV뿐 아니라 다른 성매개감염병 확산과도 관련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HIV 감염인의 약물 사용이 과소보고됐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임 원장은 국내 연구를 인용해 반복 면담으로 확인한 HIV 감염인의 불법 약물 사용률은 5.13%, 주사 약물 사용률은 2.61%였으나, 기존 감시체계에서 보고되는 약물 사용률은 이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발적 보고에 의존하는 통계만으로는 실제 약물 사용과 감염 경로를 충분히 파악하기 어렵다"며 "약물 사용과 성매개감염병의 연관성을 예방교육 안에서 더 현실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급성 감염기와 미진단 감염도 예방의 사각지대로 지목했다. 임 원장은 "급성 감염기에는 증상이 감기처럼 지나갈 수 있고, 본인이 감염 사실을 모른 채 지내는 경우가 있다"며 "위험 노출 이후 조기검사와 반복검사의 필요성을 더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의 양면성…인권 보호·정확한 예방 교육 필요
임 원장은 HIV/AIDS를 '관리 가능한 만성질환'으로 설명하는 흐름에 대한 양면성도 지적했다.
그는 치료제 발전으로 HIV 감염인의 수명과 삶의 질이 크게 개선됐지만, HIV 감염은 완치가 아니라 장기 억제와 관리가 필요한 만성 감염성 질환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치료 순응도가 떨어지거나 진단이 늦어지면 예후가 악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HIV 감염인의 사망률이 일반 인구보다 높게 나타난다는 국내외 연구를 소개하며, HIV 감염 자체가 만성 염증과 면역 활성화를 유발하고 심혈관질환, 간질환, 신장질환, 암, 신경질환 등 비AIDS 합병증 위험과도 관련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임 원장은 "혈중 바이러스가 억제되는 것이 곧 완전한 면역 회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며 "치료의 성과를 인정하되, 예방교육에서는 질병의 장기적 부담과 감염 예방의 중요성을 함께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예방수단과 관련해서는 콘돔 사용, 노출 전 예방요법인 PrEP, 노출 후 예방요법인 PEP 등이 HIV 예방에 중요한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콘돔은 일관되고 정확하게 사용해야 효과가 있다고 언급했다. PrEP 역시 HIV 예방 효과는 높지만 다른 성매개감염병을 예방하지 못하고 정기검진과 복약 순응도, 비용, 부작용 등의 문제가 뒤따를 수 있다고 부연했다.
아울러 임 원장은 감염인 인권 보호와 공중보건 정보 제공 사이의 균형도 강조했다. 낙인과 차별을 줄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낙인이 강하면 감염 우려가 있는 사람이 검사를 회피하고, 진단과 치료 접근성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인권 중심 접근이 감염 경로와 위험 행동에 대한 설명을 위축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임 원장은 "'누구나 감염될 수 있다'는 보편적 메시지는 낙인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되지만, 특정 행동과 네트워크에서 위험이 더 높게 나타난다는 역학적 사실까지 흐려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임 원장은 "감염인을 존중하는 것과 감염 위험을 정확히 알리는 것은 서로 충돌하는 가치가 아니다"며 "청소년과 일반인이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정확한 예방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공중보건의 책무"라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