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이지원 기자] 최근 정부가 약가제도 개편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제약업계에서는 제도 개편 강행 시 산업이 붕괴할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정부는 제네릭 개발 쏠림을 줄이고 신약개발을 독려하기 위한 추진이라고 주장하지만, 신약개발 기업의 연구개발(R&D) 재원 역시 제네릭에서 나오는 만큼 혁신·투자 위축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제약바이오산업 발전을 위한 약가제도 개편 비상태대책위원회(비대위)가 22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약가제도 개편안은 국내 제약산업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라며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앞서 보건복지부는 2025년 제22차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를 열고, 약가제도 전면 개편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이에 제약업계는 비대위를 구성하고 약가제도 개편에 대응하고 있다. 최근에는 비대위 참여 단체 회원사 CEO 대상 긴급 설문조사를 시행해 약가제도 개편에 따른 영향을 분석하고 있다.
이날 비대위 노연홍 공동위원장(한국제약바이오협회 회장)은 1999년 실거래가 도입 이후 10여 차례 약가인하가 단행됐지만 제도의 효과와 부작용, 산업 영향 등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기존 약가 정책과 이번 개편안이 국민건강에 미칠 영향을 분석해 합리적 개선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노 회장은 "약가제도 개편 강행 시 기업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산업 근간을 흔들 것"이라며 "제약바이오산업은 보건안보와 국가 경쟁력의 핵심 기반이다. 단순한 재정절감의 수단이 아닌 산업 경쟁력을 지속·발전시킬 수 있는 약가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비대위에 따르면 상위 100대 제약사의 영업이익률은 4.8%, 순이익률은 3% 수준에 불과하다. 이런 가운데 약가제도 개편이 추진되면 신약개발, 파이프라인 확장, 기술 수출로 이어온 산업 성장 동력이 상실될 수 있다고 비대위는 경고했다.
비대위 윤웅섭 공동위원장(한국제약바이오협회 이사장)은 "제네릭 약가 산정 비율이 40%로 변경될 경우 인하율은 최대 25.3%에 달한다. 이를 2024년 국산 전문의약품 약품비 전체에 적용하면 연간 최대 3조6000억원에 이르는 산업계 피해가 발생한다"며 "제약산업의 기반이 무너지면 회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밝혔다.
윤 공동위원장은 "현재 제약산업 매출의 12.0%, 혁신형 제약기업은 13.4%를 R&D에 투자하고 있다. 이를 통해 국산 신약 41개, 파이프라인 3233개로 세계 3위, 기술수출 20조원의 성과를 거뒀다"며 "약가인하는 R&D와 설비 투자를 위축시켜 산업의 성장 동력을 훼손한다. 실제로 수익이 1% 줄어들면 R&D 투입 비용은 1.5%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설비 투자의 증가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약가제도 개편이 강행될 경우 설비 투자 역시 축소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제약바이오 5대 강국 목표 달성이 요원해진다"며 "1999년부터 2023년까지 누적 약가인하액은 63조원에 달한다. 그 사이 세계 시장 점유율은 2011년 1.7%에서 2024년 1.3%로 하락했다. 약가제도 개편안은 국내 제약 산업의 지속가능성과 미래 성장 기반을 근본적으로 훼손할 수 있는 중대한 결정"이라고 부연했다.
비대위 조용준 부위원장(한국제약협동조합 이사장)은 약가제도 개편은 국산 전문의약품의 공급 부족과 국민 건강 위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 부위원장은 "국산 전문의약품은 만성질환이 보편화된 초고령 사회에서 국민 건강을 지탱하는 필수안전망이다. 국산 전문의약품은 치료 비용을 낮춰 더 많은 환자가 의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2016년부터 2020년까지 신규 제네릭 62개 성분이 시장에 진입하면서 5년간 약 4000억원의 건강보험 재정 효과가 발생했다. 수입의약품 대체와 건강보험 재정 절감과 같은 사례는 국산 제네릭 의약품이 국민 건강과 보건안보의 핵심 기반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약가인하로 인해 자국 생산기준이 감소할 경우 의약품 공급망 위기가 현실화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어 일본 사례를 언급하며 "지속적인 약가인하는 의약품 품절과 공급망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필수의약품과 저가·퇴장방지 의약품의 채산성 악화는 실제 공급중단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최근 6년간 147건의 의약품 공급중단 사례가 발생했고, 응급상황에서 사용되는 필수의약품과 항생제, 분만유도제, 신생아 치료제 등에서 품절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조 부위원장은 "원료의약품도 상황이 심각하다"며 "중국과 인도 등 저가 원료의약품에 대한 해외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현재 우리나라의 원료의약품 자급률은 30% 안팎에 그친다. 국산 전문의약품 공급 기반 약화는 보건의약품 공급 불안과 국민 건강 위험으로 직결된다"고 부연했다.
비대위 류형선 부위원장(한국의약품수출입협회 회장)은 약가인하는 곧 고용 감축으로 이어진다고 경고했다.
류 부위원장은 "제약바이오 산업 전체 종사자는 약 12만명이며, 약가제도 개편 시 이 중 10% 이상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며 "약가인하에 따른 제네릭 매출 감소액은 3조6000억원으로 추산되며, 여기에 고용유발계수를 적용하면 약 1만4800만명이 실직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류 부위원장은 "제약산업은 다른 첨단 제조업에 비해 고용 창출 효과가 높은 산업"이라며 "매출 10억원 당 고용유발계수는 제약산업이 4.11명으로 반도체 1.6명, 디스플레이 3.2명을 상회한다. 제약산업은 연구, 생산, 품질, 관리 등 전문 인력과 정규직을 중심으로 안정적 고용을 창출했다. 이런 고급인력 중심의 일자리가 위축되는 것은 단순한 숫자 이상의 손실을 의미한다"고 했다.
류 부위원장은 특히 지방에 일자리 감축 영향이 집중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제약산업의 생산시설 653개와 연구시설 200여개가 전국 17개 시도에 분포해 있다"며 "약가제도 개편으로 인한 고용 축소는 해당 지역의 일자리 감소에 그치지 않고, 전후방 연고나 산업의 위축으로 이어져 지역 경제까지 타격을 주는 등 연쇄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비대위 김영주 기획정책위원장(종근당 대표이사)은 "시장연동형 실거래가제는 유통질서를 역행한다"며, 오히려 가격 왜곡과 불투명한 거래 확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언급했다.
김 기획정책위원장은 "국공립병원 입찰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1원 낙찰과 같은 초저가 낙찰이 병·의원과 약국까지 확산될 경우 과도한 할인 경쟁이 발생할 것"이라며 "이는 경쟁 제약사의 정상적인 영업 활동을 위축시킨다. 또한 이 과정에서 CSO 의존이 높아지고, 유통 투명성이 훼손될 것이다. 실제로 리베이트 쌍벌제와 투아웃제 시행 이후 CSO가 급격히 팽창해 현재는 약 2만개소를 초과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기획정책위원장은 이번 제도는 실패한 제도로 평가되는 시장형 실거래가 제도를 재도입하는 것에 불과하다며, 저가구매 인센티브 확대 시 원내·원외 시장에서 수천억원에서 최대 2.4조원 규모의 손실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어 "해당 제도로 발생한 재정 절감액이 제약산업 R&D 분야로 환원되지 않고 일부 대형병원에 귀속되는 것은 제도 추진 타당성을 떨어뜨린다"고 부연했다.
이에 김 기획정책위원장은 유통질서를 확립하는 CSO 관리 체계 마련을 제안했다. 그는 "CSO 증가로 의약품 유통의 불투명성이 확대되고 있으나 현행 제도와 산업계 자정만으로는 관리의 한계가 있다"며 "정부 차원의 현장 실태조사 실시와 관리·감독 기준 정비, 수수료 관리 등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마지막으로 비대위 이재국 국민소통위원장(한국제약바이오협회 부회장)은 "약가인하 정책에 대한 체계적인 평가와 사전분석이 필요하다"며 "1999년 실거래가제 도입 이후 건보재정 절감을 이후로 정부는 10여차례 약가인하 정책을 시행했고, 약가는 크게 하락했다. 하지만 약가인하 정책이 국민과 의약품 접근성 등에 어떤 영향 미쳤는지에 대한 평가는 부재하다. 정책 효과에 대한 검증 없이 유사한 약가인하만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국민소통위원장은 "국내 제약산업이 수행해 온 R&D 혁신과 안정적 공급 등에 대한 정책적 고민이 결여됐다"며 "이제는 산업계의 의견을 정례적·제도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공식 협의체의 상시가동과 거버넌스 기반의 합리적 의사결정 구조를 마련해 제도 수용성을 높여야 한다. 이미 정해놓은 일정에 맞춰 밀어붙이기보다는 시행을 일정 기간 유예한 뒤 산업계와 협의하고 역량 평가 등을 통한 재검토 과정을 거쳐 균형 있는 개선안을 도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질의응답에서는 약가제도 개편 과정에서 산업계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에 비대위는 정부가 올 1분기부터 약가제도 개편을 준비해 왔지만, 산업계와의 협의는 사후 관리나 미시적 제도 개선에 국한됐으며 이번처럼 대규모 약가 인하를 전제로 한 총괄적 논의는 사실상 없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개편안이 2월 말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의결을 전제로 추진되는 구조에서 산업계 의견이 실질적으로 반영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
1999년 실거래가제 도입 이후 누적 약가인하액 63조원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는 "약가는 한 번 인하되면 회복되지 않는 구조적 특성이 있어 인하 효과가 누적될 수밖에 없다"며 "1999년 대비 현재 전반적인 약가 수준은 절반 이하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비대위는 이러한 환경에서 신약 개발과 기술수출 성과가 나온 것은 정부에게 '여력이 있다는 신호를 주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산업의 체력이 남아 있어서가 이룬 성과가 아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력해 성과를 만든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지금은 이 성과를 가지고 도약할 때다. 향후 몇 년 내 '골든타임'이 오는 만큼 큰 성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보인다. 하지만 추가적인 약가인하는 국내 제약산업의 상승 사다리를 걷어차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제네릭 약가 인하가 원료의약품 공급망과 직결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약가 인하로 수익성이 악화될 경우 기업들은 불가피하게 원가 절감에 나설 수밖에 없고, 그 결과 국산 원료 사용 비중이 줄어들면서 중국·인도 등 해외 저가 원료 의존도가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정부가 제시한 재정 절감 효과(약 1조원)와 산업계가 추산한 피해 규모(최대 3조6000억원)의 차이에 대해서는 정부 추산은 일부 고가 품목에 대한 단기 효과만 반영했지만, 산업계는 신규 등재 의약품과 향후 주기적 인하까지 고려한 장기적·구조적 영향을 반영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비대위는 국내 제약산업의 붕괴는 신약개발부터 바이오산업 등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비대위는 "제네릭 산업에 대한 정부 이해가 더 필요하다"며 "신약을 개발하는 회사도 사실상 제네릭에서 매출이 나온다. 이를 통해 신약을 개발하고 있다. 또 국내 제약사는 신약, 제네릭 외에도 바이오벤처에 투자하고 있다. 약가 인하로 제약사의 수익 구조가 흔들리면 그 여파가 바이오벤처와 관련 산업 전반으로, 연쇄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