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윤영식 기자] 스테프 르완도스키(Stef Lewandowski)는 '뜻밖의 우연을 가속화하기(Accelerating serendipity)'라는 글에서 어떻게 '행복한 사고(accident)가 더 자주 일어나게 할 수 있는가?'라고 물어본다. 필자의 마음에 와닿는 첫째 대답이 '그냥 나타나는 것(Just turn up)'이고, 둘째가 '자신을 올바른 장소에 있게 하는 것(Put yourself in the right place)'이다.
우리는 어떤 모임에 초대받으면, '연말이라 내가 요새 너무 바쁜데…… 거기까지 가려면 시간이 너무 걸리는 거 아닌가? 거기 가서 무엇을 얻을 게 있을까?' 등 모임에 안 갈 이유를 한두 번쯤은 생각하게 된다.
2011년 11월 3일 ㈜한독에 첫 출근을 하며 어떤 (과학적) 모임이든지 가야 할 이유를 만들기로 작정을 했다. 연세대와 화학연구원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혁신(Innovative)과제'를 심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그 자리에서 수락했고, 11월 8일 팔래스호텔에서 열린 과제 발표회에 참석했다.
윈트신호전달계(Wnt pathway)를 타겟하는 다섯 과제의 심사가 준비돼 있었다. 그 자리에서 연세대 최강열 교수를 처음 만났다. 그는 골다공증 치료제 개발을 위한 정말 흥미로운 '퍼스트인클래스(First-in-class)' 과제를 수행 중이었는데, 무엇보다 사이언스가 단단하고 아직 안 가본 길을 주도하고 있었다. KO 마우스 모델까지 만들어서 그 타겟을 제거하면 뼈가 튼튼하게 잘 자라는 것도 보여줬다. 기초연구는 정말 좋았지만 문제는 대부분의 과제가 윈트신호전달계의 특성 때문에 단백질과 단백질간의 상호작용(protein-protein interaction)을 차단하는 저분자화합물을 만드는 어려운 연구들이었다. 내가 던진 질문들이 괜찮았는지 최 교수는 평가가 끝나고 내게 다가와 이 과제보다 더 흥미로운 항암제 과제가 있으니 꼭 보여 드리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2011년 12월 13일 오후 3시 최강열 교수와 다시 만났다. 그가 보여주는 데이터를 보자마자 내 눈이 휘둥그래졌다. '와우, 이런 과제를 만나다니!' 이것은 틀림없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Wnt pathway와 Ras pathway를 지난 20년간 일한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었다. 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 'Just turn up'을 하겠다고 마음에 결정하고 실천하니 'Put yourself in the right place'라는 두 번째 조건으로 바로 연결됐다.
마치 운명에 의해 만나진 것처럼, 단순한 행운인지 준비된 우연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그날은 바로 내 생일이었다. 그것도 나의 환갑 생일이었다. 잔치는 물론 안했지만 큰 생일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제는,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모든 신약개발을 진행하겠다는 '나'를 과연 최교수가 믿고 따라올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한독보다 더 크고 나은 국내 제약사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2012년 4월에 최 교수의 논문이 발표되자 다른 회사들이 최 교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L, C, G, J 4개의 회사가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자 그 당시 아직 한독과 어떤 계약도 체결하지 않은 최 교수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연했다.
2012년 8월 20일, 최 교수가 단장인 사업단 하계발표회에서 한독의 의약품화학(medicinal chemistry)이 다른 회사에 뒤지지 않는다는 발표를 하고, 회사 내에서(in house) 직접 후보물질 합성을 할 수 있게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것도 청평으로 '그냥 나타나는 것(Just turn up)'이었다. 여름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가 엄청 쏟아졌다. 남한강을 따라 꼬불꼬불 거의 2시간 넘게 비를 맞으며 서울로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기분은 매우 좋았다.
쳥평에서의 발표 후 필자는 회사의 최고경영진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오픈 이노베이션으로 해결할 수 는 없고, 최소한 한독 내 브레인(brain)이 과제를 진두 지휘하는 시스템이 돼야 한다고. 그 결과, 2012년 12월 10일 아직도 제일 잘 나가는 머크의 당뇨병 약인 자누비아를 직접 합성하고 개발에 참여했던 김두섭 박사가 한독에 첫 출근하게 됐다. 그리고 2012년 12월 26일 연세대와 한독이 Wnt 과제 계약서에 사인하는 협약식을 거행했다. 그 자리에 나는 없었다. '그냥 나타나는 것(Just turn up)'이 좋지만 이런 좋은 자리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No Show)'도 괜찮았다. 멀리 뉴욕에서도 마음이 뿌듯하였기에.
세계적인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21세기에는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생각지도 못했던 목적'을 위해 찾아온다"고 했다. 또한, "이 '보이지 않는 손님'을 우연하게라도 발견한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말은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미래를 지향하는 기업들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의성 또는 창조성은 필연이 아닌 우연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이 '노력 속의 행복'이라고 한다. 반면, 네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운'이라고 한다. 네 잎 클로버의 '행운'을 찾기 위해 세 잎 클로버 '행복'을 짓밟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늘 노력하고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자에게만 '세렌디피티'는 성탄절 밤에 내리는 눈처럼 소리 없이 조용히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