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2021년 전반기 레지던트 1년차 지원이 마무리됐다. 지난 8월 열악한 의료환경을 우려해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이들이 전공의들이었던 것만큼, 이번 전공의 지원 현황에 현재 의료 시스템과 사회 전반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번 지원 현황의 가장 큰 특징은 소위 인기과와 기피과의 간극이 더 명확해졌다는 것이다. 피부과, 성형외과, 정형외과, 재활의학과 등 인기과로 분류되는 과들은 꾸준한 100%를 훨씬 웃도는 지원율을 자랑하고 있는 반면 생명 유지와 직결되는 바이탈 과목들의 하락세가 뚜렷했다. 특히 이번년도 소아청소년과 지원율이 급감해 30%대에 머물며 존폐의 위기감마저 고조되고 있다.
의료계는 수련 일수 감축 등 단기대책의 효과가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수가체계 개선이나 전공의 수련환경 개선이 이뤄지지 않으면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 마저도 전공의 모집 현황 시즌에만 '반짝' 관심을 갖다 금세 묻혀 개선이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비뇨의학과‧흉부외과‧가정의학과 등 기피과 지원율 절벽
9일 의료계에 따르면 올해도 외과, 소아청소년과, 흉부외과, 비뇨의학과, 가정의학과, 산부인과 등 기피과들은 전공의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심지어 일부 기피과는 빅5병원에서까지 미달 행진을 이어갔다. 특정 과목 기피현상이 그동안 문제가 됐다고 하더라도 빅5의 경우 항상 예외였던 만큼 올해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는 얘기다. 소아청소년과의 경우 서울대병원은 16명 정원에 14명 지원에 그쳤고 서울아산병원(8명/4명), 삼성서울병원(8명/3명), 세브란스병원(14명/3명), 가톨릭중앙의료원(13명/3명) 등으로 전체 미달 사태를 겪었다.
가정의학과는 지원율 60%대로 정원을 1명도 채우지 못한 수련병원이 10곳이 넘는다. 가정의학과는 최근 지속적으로 지원율이 하락하고 있다. 2016년 112%에서 2019년 처음 89%로 미달 사태를 겪더니 2020년 80%, 2021년 60%로 하락세를 보였다.
산부인과도 올해 지원율 76%로 미달 사태를 면하지 못했다. 산부인과는 2017년도까지 지원율 104%로 정원을 맞춰오다 2018년도부터 지원 전공의가 부족한 상황이다. 2018년부터 2020년도까지 지원율 80%대를 유지하다 올해는 70%대로 추락했다.
올해는 무엇보다 소청과의 지원율 하락이 유독 눈에 띈다. 소청과는 2019년도까지 지원율 101%로 정원을 소폭 상회해 왔지만 2020년도 70%대로 떨어지더니 올해는 33%로 반토막이 났다. 이외 흉부외과와 비뇨의학과도 각각 지원율이 40%와 70%대로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내부요인: 저수가로 앞길 막막한데 살인적 업무로딩 까지
사실 전공의들이 기피과를 꺼리는 현상은 올해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례로 흉부외과의 2009년 지원율은 최저치인 27%까지 추락한 전례가 있고 당시 외과도 지원율이 64%를 기록했다.
그렇다면 올해 특히 기피과 현상이 두드러진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우선 내부적 요인으로 저수가와 업무 과부하를 이유로 꼽는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2017년 '전공의 수련 및 근무환경 실태'를 조사한 결과, 지원 기피과 문제가 생기는 원인으로 과반수 이상이 '저수가'를 지목했다. 기피과는 저수가로 인해 노력에 비해 적절한 보상이 이뤄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전공의가 52.9%나 됐다.
이 같은 조사 결과는 결국 기피과가 수련 후 전망이 좋지 않다는 생각으로 연결된다. 실제로 전문과목을 선택한 이후 전공의 수련 포기 및 전공 교체 이유 중 두 번째로 많은 인원이 '수련 후 전망이 좋지 않아서(18.4%)'라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상이 무한 경쟁시대에 접어든 의료계 내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한다. 낮은 수가로 인해 개원에 대한 부담이 있을 뿐더러, 원가 보전을 위해 진료와 수술 건수를 늘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젊은의사들이 선택하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는 것이다.
대한외과의사회 이세라 보험부회장은 "현재 외과 봉직의와 요양병원 봉직의 급여가 비슷하다. 그렇다면 수술이라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외과를 전공하고자 하는 이들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며 "개원을 하기도 힘들고 하더라도 운영 자체가 어려워지는 의원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실제로 맹장수술 수가가 7만 5003원(종별 가산율 미포함)인데, 외과 환자가 줄고 있어 연간 수술이 1300례도 안 된다. 레지던트 기간이 힘들더라도 밖에 나와서 그릴 수 있는 미래가 있다면 괜찮지만 지금 기피과들은 밝은 미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또 다른 내부적 이유로는 힘든 수련과정이 지목된다. 의료정책연구소 조사결과, 전공의가 수련을 포기하는 이유로 '업무 로딩이 많아서'라는 답변이 48.1%로 가장 많았다. 실제로 기피과 대부분이 많은 업무량으로 전공의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은 곳이 많다.
대한흉부심장혈관외과학회 이성수 교육위원장(연세의대 흉부외과학교실)은 "흉부외과는 난이도가 높은 술기를 주로 배워야하는 특성상 주 80시간 전공의법을 지키기 매우 어렵다"며 "전공의들 사이에서 힘든 과라는 인식이 박히면서 미달 사태가 악화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올해 세브란스 흉부외과에 지원했던 전공의 3명도 모두 중도 포기했다"고 말했다.
외부요인: 코로나19‧인턴 공백 등 우려로 기피과 문제 심화
고질적인 내부요인 외에도 특히 올해 기피과 현상이 가속화된 이유도 있다. 바로 코로나19와 의대생 의사 국가고시 미응시에 따른 인턴공백 문제다.
코로나19로 인한 펜데믹 상황의 장기화는 일부 기피과들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했다. 특히 올해 가장 큰 지원율 하락 사태를 맞은 소청과가 코로나19의 가장 큰 피해자다. 소청과를 찾는 환자 대부분이 호흡기 질환 환자인데 마스크 착용으로 인해 환자 자체가 줄고 감염의 두려움으로 인해 병원 방문 자체도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2019년도 상반기에 비해 2020년도 상반기 병원급 소청과 명세서건수는 28.7%가 줄었다. 의원급에서도 명세서건수가 지난해에 비해 36%나 감소했다.
국시 미응시로 인한 인턴공백 문제도 기피과 지원율 하락에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기피과의 경우 인력 부족에 대한 체감이 훨씬 심각하게 나타나게 되고 결국 기피과 레지던트의 업무 로딩 과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빅5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기피과 전공의 A씨는 “실제로 내년 인턴 공백이 심각하게 우려되는 상황에서 기피과 업무로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며 “원래 심각한 문제였지만 올해는 특이한 외부요인으로 인해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는 듯하다”고 말했다.
단기 대책으로 어렵다…수련환경개선‧수가체계 개선이 근본 해결책
기피과 문제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닌 만큼 지금까지 정부의 노력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2009년 당시 정부는 최악의 지원율을 보인 흉부외과와 외과의 수가를 각각 100%와 30% 등 인상 조치했다.
또한 2003년부터 기피과 전공의 지원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전공의 수련보조수당도 신설했다. 당시 정부는 국공립병원 흉부외과, 외과 산부인과, 병리과, 결핵과 등 8개과에 월 50만원을 지원했다.
그러나 전공의 확보율이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과목 간 형평성 논란만 야기돼 왔다. 이에 2016년 응급의학과를 제외하고 수련보조수당이 폐지됐으며 응급의학과 수련보조수당도 내년 2월을 끝으로 폐지 수순을 밟게 된 상태다.
대부분의 기피과 학회는 수가체계의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 한 기피과의 본질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의료정책연구소 조사결과에서도 기피과 수가인상과 가산율을 조정해 안정적인 진료여건을 보장해야 한다는 여론이 71.4%로 가장 많았다. 이외 의료사고 등 진료 위험요인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9.4%, 수련 중 정부지원 확대 방안이 9%, 전공의 정원을 적정한 수준으로 대폭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7.4% 등이었다.
구체적으로 대한흉부심장혈관외과학회는 현재의 보험급여체계가 원가의 70% 정도에 머물러 있고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수술‧처치수가로 인해 검사와 영상수가로 보전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봤다.
따라서 수술과 처치가 주된 수입이 되는 외과계의 상황을 고려해 수가체계를 개선하면 전공의 부족으로 인해 흉부외과 전문의 업무량이 증가하는 악순환의 고리도 끊어질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와 더불어 수련기간을 기존 4년에서 3년으로 줄이는 방안도 고려 중이다.
대한비뇨의학회도 정부 지원이 절실하다는 입장이다. 구체적으로 학회는 수가조정, 비뇨의학과 약물처방 우선권, 요역동학검사 판독료 신설, 전립선암 국가암검진 지정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외과학회도 마찬가지다. 학회 측은 "외과 환자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한 환자라도 정성스럽게 심층 진료를 했을 때 진찰료나 행위료에 대해 적정하게 산정해주는 것이 맞다"며 "정부의 국고지원금 제도를 유지하면서 해당 재원을 기피과 등 필수의료 쪽으로 적극 투여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에 가장 큰 지원율 하락을 경험한 소청과학회는 코로나19로 인한 소청과의원 긴급 재정 지원 등 1차의료기관 지원책과 더불어 상담수가 신설, 소아연령 수가 가산 등 수가 개선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학회는 소청과 전공의 수련비용을 국가가 부담하는 등 수련환경 개선을 위한 인프라 구축도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선 전공의들도 단편적인 해결책보다는 수가 개선과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 등 근본적인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며 구체적인 정부 대안을 기대하고 있다.
주예찬 대한의사협회 대의원(건양대병원 비뇨의학과 전공의)은 "기피과 문제는 쉬우면서도 어려운 문제"라며 "수련환경개선과 특정 기피과의 수가 개선이 이뤄지지 않을 시 졸업 요건 변경이나 수련일수 감축 등으로 단편적인 해결은 가능하나 근본적인 해결이 어렵다"고 말했다.
대전협 이경민 전 수련이사(동국대 일산병원 응급의학과 전공의)는 "올해 소청과의 지원율이 눈에 띄게 감소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전부터 고질적으로 진행되던 문제가 반복된 것으로 보고 있다"며 "개선 방안 역시 매년 이 시기에만 조명될 뿐,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 전 수련이사는 "바이탈과의 수가 상향과 대기 인력에 대한 근로 인정 및 지원, 24시간 대응할 수 있는 전공의 인력 확보 기준을 강제화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있다"며 "특히 기피과인 바이탈과는 환자와 의사간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올해는 정부의 단편적 해결방안이 곪아 터져 환자-의사간 불신만 부채질한 한 해였다. 레지던트 지원율이 이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지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