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들을 빠르고 쉬운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편리한 삶을 누리고 있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금세 페이스북을 통해 공유되고 거기에 한글 설명까지 덧붙여져 너무나 편하게 정보를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실정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받은 정보를 실제 유용한 지식으로 활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에 필자는 미국의 연구중심병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상을 소개함으로써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미국 병원 시스템에 대한 이해를 돕고 한국 실정에 맞는 인공지능 기반의 메디컬 헬스케어 시스템 구축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My Life in Boston
필자가 소속된 보스턴의 매사추세츠 제너럴병원(이하 메스 제너럴)은 하버드의대의 여러 부속병원 중에서 가장 큰 병원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병원 순위를 발표할 때면 늘 1등 아니면 2~3등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이 순위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메스 제너럴은 연구를 장려하는 병원이라는데 그 의미가 크다. 언제든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은 다른 병원에 비해 월등하다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연구하는 의사와 박사들이 오히려 환자를 돌보는 의사보다 더 많게 느껴질 정도다. 필자 역시 전자공학과 바이오 메디컬의 학위를 받고 이곳에서 10년째 연구를 하고 있는데, 이는 병원으로 들어오는 엄청난 연구비 덕분이다.
필자가 소속된 영상의학과만 해도 매년 9천만 달러가 연구비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최근에 NVIDIA로부터 의료영상에 대한 머신러닝 연구를 위해 1천만 달러의 연구비를 받기도 하고, DGX-1이라는 매우 빠른 시스템도 기증받아 축하파티를 한 적이 있다. 더 놀라운 건 이번 기부를 시작으로 더 큰 기부금들이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증받은 DGX-1 시스템 2대 덕분에 우리 연구실에서는 개인이 한 대의 슈퍼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다. DevBox라는 GPU 4개가 연결되어 있는 시스템을 하버드 박사과정 학생이 혼자서 한 대 사용하고 있고, 다른 한 대는 시니어 연구원이 사용하고 있다.
또 이곳에서는 특허를 낼 수 있는 내용을 주로 연구하기 때문에 우선순위가 특허, 페이퍼, 콘퍼런스 발표 순으로 정해져 있다.
여기서 수련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게 되면 졸업과 동시에 회사를 설립할 기술과 특허가 자동으로 준비된다고 할 수 있다. 아주 열심히 일을 하고 있고, 협력하는 회사에서 실제 제품을 개발하는 박사급 실무자들도 연구실을 수시로 방문해 어떤 문제가 있는지 피드백을 받아 간다.
그리고는 연구실에서 새로 업그레이드된 기능 등을 먼저 테스트하기도 한다. 이처럼 회사와 학교, 병원의 협업이 아주 잘 이뤄진다.
뿐만 아니라, 연구실에서 진행된 연구들이 실제 병원에 사용될 수 있도록 의사들과도 지속적으로 미팅을 한다. 필자의 경우도 과장(division chief)부터 레지던트까지 일주일에도 여러 번 의료진과 미팅을 하며 지내는데, 아이디어가 끊임이 없다.
지금까지는 레지던트들과 같이 한 일들이 더 큰 성과를 거두고 있는데, 그들도 전문가가 되기 위해 수련의로서 공부를 하고 있는 중에 문제점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덕분이다. 물론, 이 과정은 귀찮고 힘들 수도 있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수작업이 필요해 어려움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고통점(pain points)이 바로 우리가 찾고 있는 좋은 문제들이며, 이를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으로 자동화해 나가고 있다.
일손이 모자라서 학부(undergraduate) 학생들까지 데려다가 프로젝트를 하는데 이들의 실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도 해결해 본 적이 없는 문제를 푸는 데는 경험도 중요하지만 무경험의 창의력이 더 효과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름엔 고등학생들도 연구실로 와서 연구에 참여한다. 보통은 추천을 받아서 오지만 프로그래밍을 너무 좋아해서 찾아오는 친구들도 있다.
이런 친구들은 경험을 쌓아서 좋고, 연구실에서는 부족한 연구원의 작은 몫을 하기에 감사하다.
하지만,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아직 부족해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훌륭한 연구자와 팀을 만들어서 연구를 경험하게 하는데, 정규 과정을 통해 학위와 경험을 얻은 연구원(disciplined scholar)과 새로운 방향으로 접근하는 학생(creative novice)이 함께 문제를 풀어간다. 이를 훈련된 창의성(disciplined creativity)이라 하고, 이런 접근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 적이 많다.
이렇게 진행된 연구들에 관심을 보이는 또 다른 이들은 벤처캐피탈리스트(VC)이다. 많은 VC들이 한 달에 몇 번씩 연구실을 방문한다. 기밀유지협약(NDA)을 체결하고 미팅을 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몇 년 동안 만나서 아는 사이에다 다른 미팅이나 컨퍼런스에서도 늘 만나기 때문에 서로 친구가 된다.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통해 악의적인 투자자들을 자동으로 필터링하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집 아이는 라크로스라는 운동을 학교에서 하고 있는데, 한 VC 친구가 라크로스 선수 출신이라 만나면 나는 늘 어떤 코치를 아느냐, 운동하면서 포지션은 뭐였냐, 다친 적은 없냐 등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나누기도 한다.
또 반대로, 이 친구의 둘째 아이가 아파서 병원 응급실에 가게 됐을 때는 내가 잘 아는 의사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VC들의 요구 사항과 기본적인 접근 방법도 배우게 된다. 다른 VC들을 만나게 될 때 언제든지 평판조회(reference check)를 할 수 있고, 기술이 무르익으면 자연스럽게 시장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보스턴에는 이런 VC들이 많이 있고 아이들 생일파티, 운동 경기장, 연주회장 등에 이런 아빠들이 몇 년 동안 빠지지 않고 꾸준히 나타난다.
이들 VC는 결국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의 실현을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순수한 연구자들에게는 국가에서 제공하는 연구비가 가장 중요한 원천이다. 그래서 국가연구비를 실행하는 곳에서는 전문가 그룹의 컨설팅을 통해서 공정성, 자율성, 그리고 무한경쟁 등으로 연구의 질을 유지하고 향상시킨다.
이곳에는 한국 지인들에게서 들은 '눈먼 돈'은 찾아보기 힘들다. 공정한 경쟁과 훌륭한 성과로부터 창출되는 파급효과만이 진정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My Two Cents
병원에서 연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는가를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사람을 고용하고 좋은 시스템을 갖추는 것보다 한국에서 지금 더 필요한 것은, 의사들의 연구시간에 인센티브를 주는 제도다. 컨설팅 타임처럼 보너스를 지급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면 좋을 것 같다. 하루 종일 진료하고 나서 또 회식을 하고 돌아가서 밤과 주말에 연구를 하는 친구 의사들을 많이 보았다.
한국 의사들이 권위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곳에서는 의사와 박사가 함께 연구하며, 연구하지 않는 의사는 중요한 자리로의 진급이나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다. 환자 진료를 통해 얻은 지식을 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경제적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연구에 활용해야 한다.
또 한국에서는 마치 주종관계처럼 여겨져 박사들이 의사와 같이 일하는 게 힘들다는 말도 많이 듣는데, 이곳에서는 평판이 좋지 않은 의사와는 연구를 같이하려 하지 않는다. 문제점은 의사가 제시하고 해결책은 박사가 개발해 함께 특허도 내고 발표도 하며 서로 협력하는 시스템이 미국에서는 이미 정착됐다.
연구의 실패나 실수가 허용되고, 이를 바탕으로 매우 실질적인 연구를 추구해야 한다. 여기서 '실질적인 연구'라는 말은 실제 활용 가능하다(It really works)라는 의미다.
연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클리닉에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 상품으로서의 가치도 충분히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한편, '의미 있는 연구'라는 말도 많이 듣는데 이는 보통 페이퍼를 쓰기 위한 연구가 해당된다. 중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이러한 연구도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결국 임상에 미치는 영향(Clinical Impact)을 고려한 실제 사용가능한 연구가 우선돼야 한다. 이곳에서는 '벤치투베드사이드(Bench to Bedside)'라 표현하기도 하는데, 미국에서는 연구의 최종 성과는 페이퍼가 아니라 회사 설립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그래서 그 많은 의사나 교수들이 자기 연구원이나 학생들과 회사를 설립하고 연구를 끊임없이 지속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의사들이 회사의 리더십 자리로 쉽게 옮길 수 있는 환경이다. 연구를 위한 연구는 너무 재미없다. 앉아서 인터넷 서핑하는 시간만 늘어갈 뿐일지 모른다.
연공서열제, 장유유서가 아니라 능력에 따라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떨까?
학벌과 인맥이 아니라 능력이 있으면 많은 기회들이 주어져야 한다. 미국의 학교에서는 한국과 달리 많은 과목을 이수하지 않아도 되고 표준화된 시험만으로 성적을 매기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중고등학교 때부터 경시대회에 출전한다. 나도 아이 셋을 둔 한국 아빠라, 함께 연구를 했던 우수한 MIT 및 하버드 학생들에게 어떻게 공부했는지 늘 물어본다. 그러면 대답은 매번 한결같다. 좋아하는 것을 일찍 찾아서 꾸준히 경쟁하면서 배워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경진대회(competition) 출신이다. 실제 문제를 풀기 위해서 공부를 한 것이다. 공부를 잘해서 문제를 풀 수 있게 된 게 아니다. 수업시간에 배워서 시험에 나올만한 것을 공부한 게 아니라 같은 문제라도 경진대회에서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공부하고, 다시 돌아가서 확인하고 고민하면서 대회에 참가한다.
또 대회에서 자기를 능가한 경쟁 학생의 작품을 보고 '아~~~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라고 느끼는 순간 큰 도약(Quantum leap)을 경험하게 된다.
한국은 여러 가지로 행복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다른 어떤 나라도 한국처럼 빠르게 빅데이터, 머신러닝, 그리고 AI를 준비하고 진행해 나가고 있지 않다. 바둑에서의 충격적인 패배가 우리를 놀라게 했고 큰 점프를 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왔다.
대형병원들이 새로운 전문가를 유치하고 연구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큰 회사들과도 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나본 한국의 전문가들은 신문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외부로 보여지는 것과 실제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의 간격을 빨리 줄여나가야 한다. 연구비를 집행하는 곳과 강의나 방송을 통해 소개되는 선구자들, 필드에서 문제를 직접 해결하고 제품을 만들어 내는 연구자나 스타트업 회사들이 조금씩 다른 선율로 노래하고 있어 하모니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이들이 합의점을 찾고 있기(conversing) 때문에 한국식 디지털 헬스케어, 메디컬 인텔리전스, 빅데이터 분석 등으로 큰 성과를 이루어 내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