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학생이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아파트 복도를 뛰어온다. 검은 옷을 입은 건장한 남성은 뚜벅뚜벅 무표정한 얼굴로 그 뒤를 쫓고 있다. 한 달 뒤 이 여학생은 싸늘한 주검이 됐고, 이 남자는 이웃집 괴물이 됐다. 이번 사건을 막지 못한 근본 원인은 허술한 정신질환자 관리체계 때문이다.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는 이 장면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를 원한다.”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는 20일 진주 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앞서 지난 17일 새벽 경남 진주시의 한 아파트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위의 남자가 불을 지른 뒤 대피하는 주민들에게 흉기를 휘둘러 5명이 숨지고 13명이 다쳤다. 숨진 5명에는 여학생이 포함됐다.
해당 남성은 2010년 충남 공주 치료감호소에서 한 달간 정밀 정신감정을 받고 나서 ‘편집형 조현병’ 진단을 받았고, 2015년 1월부터 2016년 7월까지 진주의 정신병원에서 조현병 통원 치료를 받았다. 그는 올해 1월 진주자활센터 직원이 커피를 타주자 ‘몸에 이상이 생겼다’며 직원을 폭행했다. 아파트 주민들은 올해만 ‘5번’ 경찰에 신고했고 한국토지주택공사에 민원을 넣었다.
해당 남성의 가족들은 사건 12일 전 보호입원을 시도하기도 했다.
의사회에 따르면 정신건강복지법 44조에 따라 경찰관은 정신질환으로 자신의 건강 또는 안전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위험이 있다고 의심되는 사람을 발견한 경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또는 정신건강전문요원에게 그 사람에 대한 진단과 보호를 요청할 수 있다는 조항에 따라 경찰이 지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동안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번 사건을 막지 못한 근본 원인을 ‘허술한 정신질환자 관리체계’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의사회는 이번 사건의 원인으로 “폭력적인 중증 정신질환자가 치료를 받고 있지 않아도 어느 곳에서도 알 수 없는 사회 구조가 문제다. 중증 정신질환자의 이상 폭력 행동을 발견하더라도 경찰, 정신건강복지센터, 의료기관 등 여러 조직들의 연계가 어렵다”라고 했다.
의사회는 “중증 정신질환자의 보호, 관리가 과도하게 가족들에게 맡겨졌다. 경찰, 소방서, 주민자치센터 등의 정신건강과 정신건강복지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했다.
의사회는 이러한 ‘허술한 정신질환자 관리체계’를 보완하기 위해 세 가지를 제안했다. 첫째, 실효성 있는 퇴원 후 사례관리나 외래치료지원제도가 필요하다. 둘째, 정신질환자들을 발견하고 안전하게 치료권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연계 구조가 필요하다. 셋째, 사법 입원과 같은 형태의 가족이 아닌 국가가 정신질환자의 치료권과 국민의 안전권을 책임질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의사회는 이어 “무엇보다 경찰, 소방서, 주민자치센터 등 주민의 생활과 밀접한 기관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정신건강과 정신건강복지법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교육과 홍보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의사회는 “최근에는 임세원 교수 사건을 비롯해 유난히 많은 정신질환자들의 사건, 사고 소식이 우리를 공포에 빠뜨리고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막을 수 있고 더 이상 반복되는 비극을 지켜볼 수 없다. 이런 사건들이 반복되지 않는 사회를 원한다”고 했다.
한편 보건복지부는 최근 진주시 방화 살해사건과 관련해 현재 추진 중인 정신질환자 치료·관리체계 강화 방안을 보완 추진하기 위해 경찰청·법무부 등 관계부처와 협조체계를 구축하겠다고 19일 밝혔다.
복지부·국립정신건강센터, 경찰청, 소방청과 합동으로 발간한 '정신과적 응급상황 대응 매뉴얼'을 보완해 현장에서 정신질환으로 인한 행동 등을 현장 출동 경찰 등이 인지할 수 있도록 하고, 신속한 조치로 연계할 수 있도록 대책을 마련한다. 복지부는 향후 경찰도 정신질환에 대한 기본적 이해와 정신질환자에 대한 대응방안을 숙지할 있도록 국립정신병원 등을 중심으정기적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교육 등을 지원하는 방안 등을 경찰청과 협의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