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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평생 건보공단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

    A원장, 대학 동기 소개로 취업했더니 사무장병원

    사무장은 집행유예, 의사는 51억 환수…"너무 가혹"

    기사입력시간 2015-02-24 06:30
    최종업데이트 2016-05-11 11:44

    2005년 어느 날 의사인 A씨는 의대 때부터 친하게 지낸 B씨를 만났다.
     

    B씨는 대형병원으로 이직하게 됐다며 자신의 후임으로 K병원 원장을 맡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B씨는 K병원의 실제 오너가 의사인 D씨라고 소개했다.
     

    D씨가 A병원 인근에 K병원을 설립한 후 이중개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이 원장이 맡고 있는 것이라며 A씨에게 별 문제 없으니 믿어도 된다고 말했다. (2012년 8월 의료법이 개정되기 이전에는 의료기관 이중개설이 가능했다.)
     

    그러자 A씨는 B씨의 말을 믿고 K병원의 실제 소유주라는 D씨와 면접을 본 후 2년 가까이 원장으로 재직했다. 
     

    A씨는 비록 월급쟁이 원장이긴 했지만 병원을 키우기 위해 나름 열심히 진료하고, 직원들의 근무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A씨는 D씨가 정기적으로 K병원을 방문해 회진을 돌고 행정업무를 챙기자 그가 병원 소유주라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게 있긴 했다.  
     

    병원의 행정부장으로 일하던 J씨의 납득할 수 없는 태도였다. A씨는 가끔 J씨가 지시를 어기거나 윗사람처럼 행동해 기분이 상하곤 했다.
     

    A원장은 이런 사실을 D씨에게 알리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뜨뜻미지근한 반응만 보이고, 되레 J씨를 감싸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이런 갈등이 잦아지자 원장직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고, 결국 사직하기로 결심했다.
     

    A씨는 병원을 그만 두면서 혹시 나중에 무슨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 D씨에게 'A는 K병원의 봉직의사에 불과하며, 실제 운영자인 D에게 모든 책임이 따른다'는 공증을 요구했고, D씨는 흔쾌히 응했다.  

     

    하지만 2년 전 의원을 개원한 직후 조사할 게 있으니 경찰서에 나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A씨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K병원의 실제 주인이 행정부장 J씨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사무장병원의 늪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결과는 혹독했다.
     

    건강보험공단은 6개월 후 A씨가 원장으로 재직하던 기간 요양급여비용으로 청구한 진료비 51억원을 환수하며, 일정 기간 안에 갚지 않으면 연 9%의 이자를 부과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자만 한 달에 약 400만원에 달해 원금은 갚을래야 갚을 수 없는 ‘숫자’에 불과한 금액이었다. B씨 역시 10억원 이상 환수 책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A원장은 환수취소소송과 함께 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했지만 1심에서 모두 기각됐다.
     

    여기에다 건강보험공단은 A원장의 의원에서 청구한 진료비를 전액 압류하자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개원을 접었다.
     

    이후 그는 봉직의 생활을 하고 있지만 월급의 50%가 압류되고 있다.

     

    그는 "봉직의사로 생활하면서 매달 이자를 갚기도 벅찬데 어떻게 51억원을 납부할 수 있냐"면서 "일시불로 환수액을 내지 않는 이상 의사는 평생 건강보험공단의 노예로 살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 사건 이후 화병에 분노조절장애, 대인기피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사무장병원에 연루된 의사 중에는 자살하거나 가정이 파탄된 사례가 적지 않다. 사무장병원피해자모임의 대표를 맡았던 오성일 전 원장은 한국을 떠났다.
     

    그는 "좋은 병원을 만들기 위해 선구자적으로 열심히 일했고, 부당청구도 하지도 않았다"면서 "단지 원장직을 수행한 대가로 한 달에 200만원 정도를 더 받았을 뿐인데 수당의 100배를 토해내라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고 비판했다.
     

    그는 "나를 평생 빠져나올 수 없는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행정부장한테 배신감을 느끼지만 왜 국가가 의사에게만 이런 혹독한 벌을 내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는 "명의를 빌려줬을 뿐 의사로서 할 일을 다했는데 51억원 환수처분을 받을 만큼 내가 잘못한 거냐"고 되물었다.

     

    의사는 51억원 환수, 사무장은 집행유예
     

    K병원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던 J씨는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J씨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형에 그쳤다.
     

    A씨는 "사무장들은 책임을 피해 나가고, 만만한 의사들만 희생양 삼고 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의사들이 사무장병원인 줄 알고 취업한 게 아니냐는 시각에 대해서도 억울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물론 일부는 그럴 수 있지만 사무장병원 의사들이 잘 모르는 게 두 가지 있다"면서 "하나는 병원 운영자의 실체이고, 또 하나는 그것의 불법성"이라고 환기시켰다.
     

    의사들이 법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무장이 설립한 변호사 사무실에 취업한 변호사 역시 변호사법 위반으로 처벌받는다.
     

    그러나 사무장에게 명의를 대여한 변호사라 하더라도 그간 수임한 변호사비용을 국가가 환수하진 않는다. 변호사협회 차원에서 자율징계할 뿐이다.
     

    A씨는 “다른 직종에서는 절대 이런 식으로 대하지 않는데 유독 의사에게만 혹독하다”면서 “제대로 된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최승만 변호사(법무법인 가교)는 “2000년 대 초반만 하더라도 A원장과 같이 동료, 선배 의사 말만 믿고 사무장병원이 아닌 줄 알고 취업한 의사들이 적지 않다”면서 “이들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금액을 환수하는 것은 과도한 측면이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