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잘 압니다. 매번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하면서 항상 그 기회를 놓쳐왔고 의사들은 패배했고 분노와 자괴감에 치를 떨었던 것을. '늘 그랬는데 이번이라고 다르겠어'하는 학습된 무력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요.
이른바 4대 악법 의료정책이라고 부르는 공공의대 설립, 의대 정원 증원, 한방첩약 시범사업 및 비대면 의료 활성화에 반대를 외치며 투쟁의 깃발을 치켜들었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람' 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또 그거 다 막아봐야 본전이 아닌지, 도대체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의협이나 의료계 지도자들은 무엇을 했는지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기왕에 결사 투쟁에 나설 것이라면 수십 년 해묵은 의료계의 문제점들, 각종 악법 규제들을 다 깨부수고 의료의 패러다임을 크게 바꿀 수 있는 아젠다가 필요하지요. 예컨대 당연지정제 폐지,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 구조 개선, 수가 정상화, 선택분업 실시, 한방보험 분리 등 보다 알기 쉽고 굵직한 이슈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즉 그런 것들을 내세워서 크게 한 판 벌여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저도 느끼고 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이미 일은 벌어졌고, 다름 아닌 우리 사랑스런 후배들,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나섰습니다. 의료계가 투쟁 국면을 접할 때마다 흔히 나오는 얘기가 있습니다. 개원의들만 하는 파업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나마도 일부만 파업하면 하는 사람들만 손해를 보고, 안 하는 사람들이 반사이익을 얻고 결국 투쟁의 동력은 더욱 떨어질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지 않습니까. 장하게도 의료계의 미래인 후배들이 먼저 나섰습니다. 앞으로 십년 아니 이십년 뒤에 또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제가 예전부터 투쟁을 하려면 선배들이 솔선수범해서 병의원 문을 닫고 싸우다 잡혀가면 비로소 후배들이 뒤를 이어줄 것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후배들이 오히려 선배의 앞길을 터주고 있습니다.
소식 들으셨겠지만 이번에 의사국가고시를 보아야 하는 의대 본과 4학년 졸업반 학생들 대부분이 응시 거부를 했다고 합니다.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의사가 되는 시간이 일 년 늦어지게 되는 겁니다. 재학생들도 집단으로 휴학계를 낸다고 합니다. 학창시절에 유급을 당하거나 당했던 친구들 보셔서 알겠지만 엄청난 손해이자 스트레스입니다. 심지어는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슬프고 안타까운 경우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후배들은 기꺼이 그 길을 가기로 한 겁니다. 만약 제 자식이 그렇게 하겠다면 말렸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눈시울이 뜨거워져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Today is a good day to die"
“오늘처럼 죽기 좋은 날은 일찍이 없었다.” 1876년 리틀 빅혼의 전투에서 미국 제7기병대를 전멸시켰던 인디언 수우족의 추장 크레이지 호스(타슝가 윗코)가 전투에 임하는 전사들에게 했던 말이라고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싸움이었지만, 그날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강력한 미국 정규군에 대항해 유일한 승리를 거뒀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말은 제가 13년 전 의료법 전부개정 반대 투쟁 때 과천 집회에 가면서 올린 글에 썼던 말입니다. 그 해 우리 의사들은 의료법 개악을 막아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파업을 하고 투쟁에 나서고 대한의사협회 일을 하면서 잘 운영되던 의원이 갑자기 기울기 시작했고, 몇 년 후에는 의원을 정리하고 지방으로 내려가게 됐습니다. 폐업하는 날 짐을 정리하다가 갑자기 목이 메고 가슴이 먹먹해져서 한동안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지방에서 몇 년 고생하다 다시 서울로 오면서 다시는 의료계 일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고생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가족들은 힘들지 않게 해야지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저를 화나게 하고 전장으로 끌어내는 일이 생깁니다. 재작년 문재인 케어가 그랬고 이번에 4대 악법 의료정책이 그렇습니다.
3년 전 서울로 다시 와서 개원할 때 아는 기자분이 찾아와서 저녁을 먹으면서 물어보더군요. ‘10년 전 과천에서 왜 그러셨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잠시 생각해보니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때가 화요일인데 사흘 전 토요일에 학교 앞에 가서 후배들을 만났습니다. 당시 의료계 상황을 설명해주니 후배들이 선배님, 꼭 막아주십시오 하더군요. 문득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사실 별 대단한 이유도 없었던 겁니다. 오래 전부터 계획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아침에도 생각했습니다. 십년 뒤, 이십년 뒤에도 후회하지 말자. 나중에 후배들이 선배님들은 그 때 무엇을 하셨냐고 물어보면, '우리는 싸우다 지더라도 비겁하지는 않았다고 대답해주자'라고요.
그리곤 어느 새 10년도 더 지났습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더니 또 이런 투쟁의 날이 밝았습니다. 다시는 말자고 거듭 다짐을 했지만 또 이렇게 투쟁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번도 마찬가지입니다. 투쟁에 나설수록 개인적으로는 자꾸 손해가 되고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을 겁니다만, 그럼에도 싸우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려고 합니다.
의료계의 숱한 현안들이나 아젠다는 너무나 많고 또 그게 제 인생에 얼마나 득실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오직 하나의 소원만 말하고자 합니다.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배가 되자. 그리고 의사 선후배 동료들이 힘을 합쳐 끝까지 싸워보자."
이기고 지는 건 나중의 문제입니다. 우리 어깨를 걸고 함께 싸워보지 않겠습니까?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