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보건의료체계(Health System)’는 국민에게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인력, 의료기관, 재원 조달, 지불제도, 의료전달체계, 전문직 규제 및 환자 안전 제도를 포괄한다. ‘불법행위법(Tort Law)’은 의료행위로 인해 발생한 손해에 대한 민사상 책임과 배상을 규율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책임보험과 분쟁 해결 제도 등은 피해구제의 실효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의료사고에 대한 형사책임과 전문직 규제, 환자 안전까지 포괄하는 ‘의료책임체계(Medical Liability System)’는 이보다 넓은 개념이다. 현대의 조직화 된 의료체계에서 의료서비스의 제공과 의료사고에 대한 책임을 서로 분리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의료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하면 의사는 고위험 진료를 회피하거나 방어 진료를 할 수 있고, 반대로 책임이 지나치게 가벼우면 피해자 보호와 환자 안전 개선이라는 기능이 약화 될 수 있다. OECD 역시 의료과실 책임제도를 단순한 의료인의 처벌 문제로 접근하지 않는다. OECD는 의료사고 책임제도에서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배상(indemnification), 의료과실에 대한 억제(deterrence), 책임보험(insurance), 의료사고 예방(prevention)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하며, 의료배상 책임제도의 문제가 고위험 진료 분야의 의료인 이탈과 방어 진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다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의료사고에 대한 의사의 형사책임 제한을 둘러싸고 환자단체와 의료계 입장이 대립하는 배경에는 피해구제와 형사책임의 기능이 충분히 분화되지 못한 문제도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의료서비스의 공급과 의료사고에 대한 책임제도는 서로 영향을 미치므로, 환자 보호와 의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두 체계의 균형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도 의료사고에 대한 민사책임의 기본 법리는 존재한다. ‘민법 제750조’는 고의 또는 과실로 위법하게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사람에게 손해배상책임을 부과한다. 따라서 의료인의 과실로 환자에게 손해가 발생하면 민사상 불법행위책임을 물을 수 있다. 한편 한국 의료책임제도의 특징은 의료행위로 환자가 사망하거나 상해를 입은 경우 형법 제268조의 업무상과실치사상죄가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동 조항은 업무상 과실 또는 중대한 과실로 사람을 사망이나 상해에 이르게 한 경우 5년 이하의 금고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지나치게 형사처벌에 의존 한국식 분쟁 해결 방식 합리적 ‘의료책임 체계’ 균형 잃어
같은 대륙법계에 속하는 독일의 경우, 형법 제222조와 제229조에서 각각 과실치사죄와 과실치상죄를 규정하고 있으나, 우리나라와 같이 업무상 과실을 일반적으로 가중 처벌하는 별도의 구성요건을 두고 있지는 않다. 독일 형법 제13조는 결과 발생을 방지할 법적 의무가 있는 사람의 부작위에 의한 범죄를 규율하고, 제340조는 공무원의 직무수행 중 상해에 관한 특별규정을 두고 있다.
의사 역시 진료 관계에 따라 보증인의 지위(Garantenstellung)를 부담할 수 있지만, 이는 업무상 과실을 일반적으로 가중 처벌하는 우리나라의 형법 제268조와는 구별된다. 의료행위는 본질적으로 불확실성과 위험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의료행위를 형법 제268조의 ‘업무’에 포함해 일반적인 과실보다 무거운 형사책임을 부과하는 현행 법체계의 타당성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동일한 의료사고에 대해 민사상 손해배상책임뿐만 아니라 행정·면허상 책임과 형사책임이 동시에 또는 연속적으로 문제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책임은 각각 그 목적과 기능을 달리한다. 민사책임의 중심 목적은 피해자의 손해를 금전적으로 회복시키는 데 있다.
반면 형사법은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행위에 국가가 형벌을 부과하는 최후 수단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이처럼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책임제도가 의료사고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의료사고에 대한 해결을 과실의 발견과 형사처벌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우리나라에서 의료사고에 대한 형사책임 추궁이 국제적으로 높은 수준이라는 점도 이러한 문제를 검토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불법행위법 자체의 부재에서 비롯된 문제라기보다, 민사 배상, 책임보험, 전문직 규제, 환자 안전 및 분쟁조정이 유기적으로 연계되지 못하고 형사책임 추궁이 의료분쟁 해결의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하는 의료책임 체계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의료사고에서 환자의 관점에서는 사고가 왜 발생했는지에 대한 설명, 적절한 시기의 배상, 필요한 치료와 재활의 보장, 그리고 동일한 사고의 재발 방지가 중요하다. 의료인의 관점에서도 명백하게 비난 가능성이 높은 행위와 불가피한 합병증, 인간 오류 및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의료사고 발생=개인의 과실·책임, 형사처벌’ 의료체계 붕괴 환자 안전도 보장 못 해
환자의 경제적 피해는 민사 배상과 책임보험 및 보상 제도를 통해 구제하고, 의료사고의 원인분석과 재발 방지는 환자 안전 제도가 맡아 처리해야 한다. 또한 의료인의 윤리적 위반이나 전문직 기준에 미달하는 행위는 전문직 규제를 통해 의료의 질과 사회적 신뢰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형사책임은 의료행위의 특성과 불확실성을 고려해 업무상과실치사상죄의 적용 범위를 재검토하고, 중대한 과실에 해당하는 행위를 중심으로 형벌의 필요성을 판단하는 방향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능적 분화가 이루어지려면 ‘의료사고의 발생이 곧 의료인 개인의 과실이며, 형사처벌의 대상이 돼야 한다’는 일방적이고 단선적인 접근에서 벗어나야 한다.
특히 환자 안전의 관점에서는 개인의 과실 여부뿐 아니라 인력 부족, 업무량, 진료환경, 의사소통의 실패, 의료기관의 조직문화, 장비 및 정보시스템 등 다양하고 종합적인 요인을 함께 조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의료사고 조사의 핵심 질문도 ‘누가 잘못했는가?’에서 ‘무엇이 잘못됐으며, 왜 발생했는가?’로 확장돼야 한다. 이는 개인의 책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의료사고의 원인을 다각적으로 분석해 재발 방지의 실효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의료책임제도의 설계는 산부인과, 외과, 응급의학과 등 고위험 진료 분야의 의료인력 확보와 진료행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의료책임제도는 의료인력정책, 필수 의료정책 및 환자 안전정책과 분리해 설계해서는 안 된다. 환자의 신속하고 적절한 피해구제를 위해서는 의료배상 책임보험과 공제제도, 조정·중재 및 필요한 영역의 무과실 보상 제도를 보다 체계적으로 결합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의료의 질을 확보하고 의료인의 전문직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전문직 자율규제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 의료 수준에 미달하는 진료(substandard care)나 전문직으로서의 부적절한 행위(professional misconduct)가 모두 형사 범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전문적 기준에 미달하는 행위를 조사하고 교육·교정하거나 필요한 경우 징계하는 기능은 전문직 규제 체계가 담당하는 것이 적절하다. 이러한 기능을 실질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조사·심사 및 자율규제 체계를 확립함으로써 의료의 질과 전문직 기준에 관한 판단이 형사절차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의료사고 대응체계의 근본적인 문제는 보건의료체계와 의료사고에 대한 책임·피해구제 체계가 충분히 연계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의료인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강화하거나 완화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민사 배상, 형사책임, 전문직 규제 및 환자 안전이 각각의 목적에 따라 기능하도록 의료책임제도를 재설계해야 한다.
의료책임체계(Medical Liability System)는 보건의료체계의 외부에서 의료인을 통제하는 장치가 아니라, 환자 보호와 손해배상, 전문직 책임, 책임보험 및 환자 안전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보건의료체계의 핵심 구성요소로 재정립될 필요가 있다.
<참고 문헌>
OECD. Medical Malpractice: Prevention, Insurance and Coverage Options. Policy Issues in Insurance No. 11. OECD Publishing; 2006.
OECD. Medical Malpractice: Prevention, Insurance and Coverage Options. Policy Issues in Insurance No. 11. OECD Publishing;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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