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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라서 억울한 일

    어느 때든 의사가 지켜야 할 원칙은 있다

    [칼럼] 정명관 원장(정가정의원)

    기사입력시간 2016-10-24 06:38
    최종업데이트 2016-10-24 08:25

    사진: 게티이미지뱅크

    (1) 동네의원이다 보니 부부가 모두 환자로 다니는 경우도 흔하다.

    일부러 따로 와서는 이런 저런 부탁을 하기도 한다.

    부인이 가장 흔히 하는 부탁 가운데 하나는 남편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니 원장님이 겁을 줘서라도 끊거나 줄이게 해 달라는 말이다.

    사실 술 많이 마시는 사람은 우리 상상을 초월한다.

    매일 소주 한두병씩 마신다는 사람도 흔하다. 급기야 오늘은 매일 소주 3병씩 마신다는 분도 봤다. 어떤 분은 매일 맥주를 2000cc씩 마신다고 하고, 반주로 막걸리를 매일 한통씩 마신다는 분도 있다.

    그런데 억울한 점은 이런 말을 들을 때다.

    "우리집 아저씨가 집에 와서는 검사결과가 정상이라고 '원장님이 술 마셔도 된다'고 했다면서 계속 마신다. 그러시면 되느냐? 좀 말려달라."

    오늘도 두 번 들었다.

    그런데 문제 음주자들은 흔히 술을 마시기 위해 그런 거짓말을 한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2) 어떤 건장한 청년이 환자로 왔다. 초진이다.

    왜 왔느냐고 물으니 아프다는 얘기는 하지 않고 자기가 오늘 예비군 동원 훈련인데 불참했더니 동사무소에서 병원 진단서라도 끊어서 내라고 했다는 것이다.

    가만히 그 청년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진단서가 필요해서 온거군요. 그런데 어디가 아프지도 않는데 내가 진단서를 어떻게 떼 줍니까? 이미 사실을 안 이상 나는 진단서를 떼 줄 입장이 아닙니다. 병무청과 당사자가 해결해야 할 일을 의사를 개입시켜서 해결하려는 것은 온당치가 못해요. 허위 진단서가 됩니다. 그러니 나는 진단서를 떼 줄 수가 없어요. 정 사정이 딱하면 다른 병원에 가서 허리가 심하게 아프다거나 배탈이 나서 못견디겠다거나 하면서 차라리 의사를 속이세요. 의사에게 허위진단서를 요구하지 말고 차라리 연기를 잘 해서 의사를 속이세요."

    그랬더니 알았다며 고맙다(?)고 하면서 나갔다.

    이런 고지식한 청년 같으니라고. 진단서를 떼러 왔으면 자기가 어디가 아프다고 각본이라도 써 와야지, 그러지 않고 나를 공범으로 끌어드리려 하다니…
     

    (3) 앞의 사례와 비교하면 조금 애교스럽다고나 할까?

    하지만 근본적으로 똑같은 문제도 있다.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아파서 진료받고 학교에 제출할 진료확인서를 떼 가는 일은 흔히 있지만, 아무리 봐도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아프다고 올 때가 있다.

    그것도 하교시간이 다 지난 대여섯시나 되어서. 

    병명은 다양하다. 감기, 배탈, 두통…

    그러곤 어김없이 진료확인서라는 것을 떼어 간다.

    공통점은 증상이 이전보다는 많이 호전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이전에는 너무 아파서 집에서 앓아누워 있다가 조금 나아서 병원에 오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여하튼 이 때에도 진료 받은 것은 맞으니까 군말 없이 진료확인서를 떼어 준다.

    얼마전 오후 6시에는 무려 여중생 3명이 동시에 다녀갔다. 

    문제는 다음과 같을 때다. 학생이나 어머니가 와서 아이가 어제 아파서 학교에 못 갔는데 어제 날짜로 진료확인서를 떼어 줄 수 있느냐고 묻을 때다. 

    학교에서 진료확인서를 제출하면 괜찮다고 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럴 때는 절대 얄짤없다. 

    학생과 학교가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을 중간에 의사를 끼워 넣어서 면죄부를 주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인데, 의사를 그렇게 이용해서는 안된다. 명백한 허위진단서를 발급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그래서 이러면 타협의 여지 없이 "NO"라고 말한다.
     
    (4) 진단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요즘 실손보험 같은 것에 많이들 가입해서 진료를 받고 보험회사에 청구를 한다고 의사의 진단서나 소견서 또는 초진기록지를 요구하는 경우도 많다.

    또 폭행을 당했다고 상해진단서를 끊으러 오는 환자도 있다.

    이런 것까지 나열하자면 할 말이 많아지니까 여기서 일일이 다 쓸 수는 없지만, 어느 때든 의사가 지켜야 할 원칙은 있다.

    첫째, 허위진단서를 발급해서는 안된다.

    실제 진료 행위와 의학적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둘째, 보험금이 걸려 있거나 다른 사람과의 분쟁이 걸려 있을 때에는 신중해야 한다. 무조건 환자에게 유리하게만 쓰는 것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금전적이든 행정적이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걸려 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써야 한다.

    셋째, 다른 모든 것에 문제가 없으면 가급적 환자의 입장에서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지켜주려고 애쓴다. 이것이 내가 진단서나 진료확인서를 발급하는 원칙이다.
     
    쓰고 보니 세간을 달구었던 서울대병원 백남기씨의 사망진단서 사건이 생각난다.

    정부와 피해자가 해결해야 할 일에 의사가 끼어들어 뭇매를 맞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일일수록 의사가 억울하지 않으려면 의사로서 해야 할 일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