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정부가 내놓은 지역필수의료 특별회계 1조 2614억 원을 두고, 지역 의료현장에서 일하는 의사로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표면은 화려하다. "지방이 직접 짜고, AI가 메운다", "수도권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겠다". 그러나 그 밑에 깔린 숫자와 구조를 뜯어보면, 이것이 진정으로 지역의료 붕괴를 막을 대책인지 깊은 회의가 든다.
정부안의 문제점: 현장에서 본 네 가지 허상
첫째, 회계 장난질이다.
총액 1조 2614억 원 중 순수 신규 예산은 겨우 3689억 원(29%)이다. 나머지 8925억 원(71%)은 기존 일반회계 사업의 '꼬리표 갈아끼우기'에 불과하다. 시민사회조차 이를 "회계 돌려막기", "무늬만 확충"이라 규탄했고, 국회에서 김윤 의원이 "순증이 5천억 원에도 못 미친다"고 지적하자 정은경 복지부 장관 스스로 "더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인정했다. 지역의료 붕괴를 막겠다며 만든 특별회계가 장부상 숫자 맞추기에 그친다면, 이는 국민 기만이다.
둘째, "돈은 있으나 진료할 사람이 없다"는 현장의 비명을 외면한다.
특별회계에서 의료사고 배상보험료 지원은 전년 대비 고작 11억 원 늘어난 93억 원이다. 필수의료 붕괴의 구조적 인과사슬은 명확하다. 저수가·고위험·고강도 노동이라는 디스인센티브가 전공의·전문의를 밀어내고, 인력 부족이 당직·응급체계를 무너뜨리고, 환자는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며, 지역 병원은 경영난으로 더 많은 인력을 잃는다. 응급실에서 새벽을 지새우는 전북의 동료 의사들이 묻는다. "사고 한 번이면 인생이 끝나는데, 누가 여기 남으라고 하는가." 정부는 시설·장비 투자(지방의료원 인프라 1430억 원)에는 손을 대면서, 정작 의사가 지역에 남을 이유를 만드는 데는 인색하다.
셋째, 전북 같은 지역에는 더욱 치명적인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지역주도 의료공백 해소'라며 지방정부에 주겠다는 자율예산은 시도당 평균 170~200억 원 수준이다. 더 심각한 것은 배분 기준이다. 복지부는 "의료취약도를 고려하겠다"고만 할 뿐 구체적 기준을 내놓지 않고 있는데, '수도권·비수도권' 이분법이나 시도 단위 평균치로 배분된다면 전북은 이중으로 불이익을 받는다. 도내 의료자원은 전주권(전북대병원·원광대병원)에 집중돼 있고, 군산·익산은 물론 남원·순창·임실·장수·무주·진안 등 남부·동부 산간권은 사실상 의료 사막이다. '전북'이라는 이름으로 예산을 받아도 그 돈이 전주권으로 흘러 들어가면, 산간권 주민의 응급실 뺑뺑이와 원정출산은 그대로다.
넷째, 재원 자체가 불안정하고, "AI가 메운다"는 환상에 기대고 있다.
특별회계 재원의 상당 부분이 담배 개별소비세(55%)에 의존한다. 금연이 성공할수록 필수의료 재원이 줄어드는 자기모순적 구조다. AI 기본의료 역량 예산은 총액의 0.3%인 40억 원 — 응급·분만·중증외상은 손과 판단이 즉시 필요한 신체적 진료로, AI로 대체되지 않는다. 인력 확충 실패를 기술 담론으로 치환하는 면피성 프레임은 그만두어야 한다.
개선방안: 구조를 바꾸는 다섯 가지 제도 설계
최근 검토한 정책보고서('지역 필수의료 인구감소 대응방안')는 인구감소지역 89곳 중 79%가 군 단위이고 전국 57%(130여 곳)가 소멸위험지역이라는 현실에서, 필수의료를 단순한 복지가 아닌 '정주 인프라'로 재정의할 것을 요구한다. 전북의사회는 이 방향에 동의하며, 정부안의 한계를 넘어서는 다음의 구체적 개선방안을 제안한다.
① 특별회계의 실질화
특별회계 예산서에 기존 이관분(8925억 원)과 순수 신규분(3689억 원)을 분리 표기하도록 의무화하고, 매년 순증액을 성과지표로 삼는 '회계 투명성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나아가 특별회계 전액을 순수 신규 사업 예산으로 재편성하여 특별법이 약속한 "획기적 전환"의 실체를 확보해야 한다.
② 소진료권 단위 실측 기준의 재원 배분
시도 평균치나 수도권/비수도권 이분법이 아니라, 실제 환자가 거주하는 소진료권의 거리와 시간 — 응급실 도착 시간, 30분 내 분만 가능 시설 유무, 필수과목 진료 가능 여부, 입원환자 자체충족률 — 을 배분 기준으로 명문화해야 한다. 인구감소지역 재지정(5년 주기) 시에도 이 '의료 접근성 지표'를 지정·지원 기준에 법적으로 통합하여, 전북 산간권 같은 의료 사막이 예산 배분에서 누락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 수도권에서 멀수록 두텁게 지원하는 '역진 보상 원칙'의 실질적 구현이다.
③ 사법리스크 종식 및 국가책임 배상제도 입법화
필수의료 형사처벌 특례법 제정: 중대한 과실이 없는 필수의료 행위(응급의료·분만·중증외상·고위험 수술) 중 발생한 악결과에 대해 형사처벌을 원칙적으로 면책하는 특례 조항을 명문화해야 한다.
불가항력 의료사고 100% 국가보상제: 연 93억 원 수준에 머무는 보험료 지원을 넘어, 불가항력적 뇌성마비나 산모·태아 사망 등 고위험 필수의료 분쟁에 대해 국가가 보상 책임을 전액 부담하는 공적 배상기금을 특별회계 내 독립 계정으로 신설해야 한다.
④ 대기비용 보전형 '공공정책수가' 및 진료과목별 가중치 적용
기능 유지 보상(Stand-by Cost Compensation): 인구감소지역 의료기관은 환자 수에 비례하는 행위별수가제(FFS)로는 유지될 수 없다. 환자가 없더라도 24시간 분만실·응급실을 가동하는 대기 인력과 시설 유지 비용 자체를 정액 보전하는 '상시 대기 공공정책수가'를 도입해야 한다.
지불제도 개편 시 차등 계수 법제화: 일차의료 혁신 시범사업 등 대안 지불모형 도입 시 획일적 정액 보상을 지양하고, 원가보전율이 낮은 필수의료 과목(산부인과·소아과·정신과·외과계)에 대해 건당 가중치 1.5배 이상, 진료수입 인정률 70% 이상 상향을 적용하거나, 구조적 적자가 불가피한 필수의료 분야는 등록제 기반 지불모형에서 제외하고 별도 보상체계를 수립해야 한다.
⑤ 거점 2차 병원 육성과 의사 정주 복합 인프라 패키지
지방의료원의 '포괄 2차 종합병원' 집중 육성: 국립대병원 특화 패키지에 머물지 않고, 남원의료원·군산의료원 등 산간·해안 거점 지방의료원의 시설·장비뿐 아니라 필수과 전문의 인건비를 전액 국비로 지원하여 포괄 2차 수술·입원 기능을 수행하도록 격상해야 한다.
'강제 배치'에서 '정주 유인'으로의 패러다임 전환: 복무 기간만을 통제하는 지역의사제 대신, 전문의 취득 후 해당 지역에 안착할 수 있도록 지역가산 수당 확대, 3차 병원과의 순환 연구·연수 보장(임상 펠로우십 트랙), 배우자 일자리 매칭 및 자녀 교육 특례를 묶은 '의사 정주 복합 패키지'를 지방소멸대응기금과 매칭하여 제공해야 한다.
결언: 라벨이 아니라 구조를 바꿔야 한다
지역필수의료 살리기는 단순히 예산의 라벨을 갈아 끼우거나 병원 건물을 짓는 일로 달성되지 않는다. 고위험·저수가의 현장에서 진료를 이어가는 의료진의 사법적·경제적 안전망을 구축하고, 실제 환자가 거주하는 소진료권의 거리와 시간을 기준으로 자원을 재배분하는 정밀한 제도 설계가 선행돼야 한다.
'1조 2000억'이라는 이름값의 70%가 기존 예산 재포장이라는 사실을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 돈의 재배치는 할 수 있어도, 의사의 재배치는 돈만으로 되지 않는다. 수가·사법리스크·정주여건이라는 구조적 뿌리를 건드리지 않는 한, 이 특별회계는 응급실 뺑뺑이와 원정출산이 일상인 전북 산간권 주민에게 또 하나의 '무늬만 대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지방이 직접 짠다는 그 사업계획서에, 현장에서 환자를 보는 의사의 목소리가 반드시 담겨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지역주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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