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최근 연이어 한의사들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하는 사법부 판결이 나오면서 의료계는 패닉 상태다. 한의사 초음파 진단기기 사용이 위법하지 않다는 대법원 판례를 시작으로 뇌파계 의료기기, 최근엔 엑스레이(X-ray) 골밀도측정기까지 그 범위가 점차 확대되는 모양새다.
특히 판결 과정에서 사법부가 '의료기기 사용 관련 한의과대학의 교육 과정이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현대 의료기기 사용에 대한 분쟁은 커질 전망이다.
문제는 의료계가 바뀐 판례에 대처할 만한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최근 관련 기자회견에서 대한의사협회 집행부는 '사법대응을 준비 중'이라고 예고했지만, 대법원 파기환송심에서까지 한의사 무죄 판결이 나온 마당에 사실상 실효성을 기대하는 회원들은 적다.
더욱이 초음파, 엑스레이 골밀도측정기, 뇌파계 의료기기 등 구체적으로 진단기기를 특정하는 판례가 쌓이면서 줄줄이 이어질 판결에 대한 신속한 대응조차 어려운 상태다. 실제로 의협은 지난 13일 서울지방법원의 '한의사 엑스레이 골밀도측정기' 1심 재판 일정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의계에서 개별 사안마다 사법적 판단을 요구하고 있어 이 같은 현상은 앞으로 더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자, 장기적으로 의료일원화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지속적인 면허범위 갈등 상황을 막고 애매한 법 조항을 개선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갈수록 한방의료와 현대의료체계를 재단할 수 있는 사법적 기준이 모호해지면서 이젠 정말 이원화된 한국의 의료체계의 한계가 도래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의료일원화 추진에 대해 의사협회는 난감한 눈치다. 누구나 내년 초 회장 선거를 앞두고 의료일원화라는 민감한 화두를 건드리기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앞서 추무진, 최대집 전 의협회장 역시 의료일원화라는 큰 틀에서 의-한-정 논의를 추진했지만 번번이 회원 등 반대 여론에 막혀 논의가 중단돼 왔다.
의협 측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의료일원화는 쉬운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정부 의지가 중요하다"며 한발 빼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는 아쉬운 대목이다. 의료일원화가 쉽지 않더라도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일수록 당사자 단체들이 먼저 나서 정부가 추진력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의료일원화 논의 과정에서 곧바로 이원화된 의료체계가 바로 개선되진 않더라도 현재 의사와 한의사간 모호한 면허범위 체계 조정 등 단기적인 성과도 기대해볼 수 있다. 법조계에도 더 이상 면허범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에만 기대지 말고 정부 주도 아래 당사자들이 직접 관련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연세대 박지용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금 상태에선 의료계와 한의계의 법정 다툼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의료법에서 정한 면허범위가 모호한 측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향후엔 이를 법원의 판단에만 맞기지 말고 정부 주도 아래 의료계와 한의계 내부에서 합의를 통해 규정 등을 조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원화된 의료체계를 개선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넘어야 할 난관은 많다. 의료계와 한의계의 면허범위 논쟁이 워낙 오래된 문제고 섣부른 일원화 추진이 오히려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즉각적인 해결은 어렵더라도 현재의 '의료 이원화' 체계가 한계가 명확하다는 문제를 공론화시키기엔 지금이 적기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또 다시 의료계와 한의계 등 당사자가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이 해묵은 논쟁은 또 다시 다음 세대로 넘어가 같은 문제가 반복될 것이다.
'부위전경(扶危定傾)'이라는 말이 있다. 중국 북주의 역사를 기록한 주서에 나오는 사자성어로, '위기를 맞아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나라를 올곧게 세운다'라는 뜻이다. 중국 남북조시대 서위의 태조 우문태는 나라가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오히려 실권을 더 강하게 장악한 뒤 부병제의 근간이 된 24군제를 창시하고 동위를 제압, 사천지방을 빼앗아 영토를 확장했다.
이번 한의사 현대의료기기 사용 관련 판례 변화도 단순히 의료계의 위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 나아가 '위기를 기회로' 승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