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열린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기사를 보던 중 유독 눈에 띄는 소식이 있었다.
피아노 전공자, 의대생, 간호사 지망생 등 지난 해 8월 개봉한 '국가대표 2'의 소재가 될 정도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선수들이 어렵사리 모여 결성된 국내 유일의 여자 아이스하키팀이자 국가대표팀. 15살부터 30대에 이르기까지 연령 차이가 많이 나고 모두 배경이 달라 훈련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 매일 저녁 8시에 훈련을 한다.
여자 아이스하키의 역사를 새로 쓰다
1999년 강원동계아시안게임 이래 연패의 기록을 써왔던 그들이 삿포로에서 역대 첫 승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3승 2패로 6개국 중 4위에 올랐다. 아쉽게 메달을 놓치긴 했지만, 강호 일본을 상대로 대등한 경기를 펼치고 중국을 상대로 처음 이긴 게임이라 그들에게는 메달보다 값진 선물이었다.
아이스하키는 20분씩 3번에 걸쳐 진행되는 경기로, 스틱을 이용해 지름 7.62cm의 퍽(puck)을 상대편 골대에 넣어 많은 점수를 얻는 팀이 우승한다. 아시아리그의 경우는 무승부가 없어 연장전, 더 나아가 승부치기(슛아웃)로 승패를 가르는데 지난 삿포로 중국전은 이 단계를 다 거쳐 거둔 역전승이었다.
아이스하키 여자국가대표팀의 역사를 새로 쓴 주인공 중에 한 명이 미국 컬럼비아의학전문대학원을 다니다 휴학하고 귀화해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하고 있는 미국 전국대학체육협회(NCAA) 1부 리그 출신 박은정(Caroline Park) 선수다.
짧은 휴식을 마치고 다시 4월 강릉에서 열리는 세계아이스하키 선수권대회 준비를 시작한 박 선수를 만났다. 태릉선수촌에서 만난 그는 아이스하키선수에 대한 막연한 선입견과는 달리 다소 왜소한 체구라 의외였다.
컬럼비아의대 재학 중에도 아이스하키 플레이어로 활약
그는 캐나다에서 태어난 아버지와, 결혼 후 캐나다로 건너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캐나다 토론토에서 자랐다. 우리에겐 아이스하키가 여전히 낯설지만, 아이스하키 세계 최강국인 캐나다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서너 살부터 자연스럽게 시작하는 국민 스포츠다. 물론 아시아계는 예외이지만.
어린 시절 이민을 왔던 터라 당시에 아이스하키를 하는 건 엄두를 내지 못했던 아버지가 박 선수와 오빠에게 아이스하키를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는데, 사실 어머니는 박 선수에게 오빠와는 달리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피아노 선생님이 올 때면 배가 아프다고 화장실로 대피하던 박 선수를 더 이상 말릴 수 없던 어머니는 결국 허락했다. 8살 되던 해 아이스하키를 시작했다.
박 선수는 아이스하키 외에도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캐나다와 미국 전역에 방영된 청소년 드라마(2001년 Degrassi-the next generation, 2005년 Naturally Sadie 등)에 출연하기도 하고, '로비터슨(Robitussin)'이라는 북미의 대표적 감기약 광고 CF에 출연하기도 했다.
의학 공부를 하면서도 뛰어난 아이스하키 선수로 활동할 수 있었던 건 학교 외에도 다른 활동에 시간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하고, "네가 최고의 선수는 아니다. 타고난 재능을 가진 게 아니다"라고 말해 열심히 노력할 수밖에 없게 만든 부모님의 교육 덕분이다.
미국에서는 대학팀 소속 아이스하키선수로 5년 동안 활동할 수 있는데, 박 선수는 프린스턴대(생물학 전공) 소속으로 뛰다 나머지 기간을 지금의 콜럼비아대(의학전문대학원)에서 활동했다. 의대 수업을 받으면서 훈련을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다. 진학 후 첫 1년은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그런 시간을 보낸 덕분에 교실에서만 있어서는 배우기 어려운 나름의 '시간관리' 노하우를 가질 수 있어 값진 경험이라 생각하고 있다.
지금 목표는 내년 평창 동계올림픽 출전
2013년 한국 대표팀에 합류하게 되면서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국내에의 경력을 쌓은 후 2015년 한국 국적을 얻어 국가대표팀 자격이 주어졌다. 아이스하키에 있어 그의 목표는 평창동계올림픽이다. 국가대표팀에 합류하게 된 이유다. 무엇보다 아이스하키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고, 올림픽 출전이라는 인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라는 생각에 선뜻 한국 행을 결심할 수 있었다.
2013년 대한아이스하키협회는 정몽원 회장이 취임하면서 평창 동계올림픽을 목표로 대표팀 전력 강화를 위해 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선수 영입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홍보팀 김정민 팀장이 미국 학교 팀 명단을 훑어보다 한국 성을 가진 선수를 발견하고 연락을 취하게 됐다.
김 팀장이 처음 연락한 선수는 캐나다 대학 1부 리그인 CIS 출신의 임진경(Danelle Im) 선수. 한국교포 2세로 해외파 중에 가장 먼저 대표팀에 합류했다. 임 선수 가족의 소개로 박 선수가 연락이 닿았고, 또 박 선수의 아버지 소개로 박 선수와 함께 NCAA 1부 리그에서 활동 중이던 어머니가 한국계인 하버드대 랜디 그리핀을, 그리고 여자 코칭 스태프가 미네소타의 마리사 브랜트를 섭외하게 되면서 해외 출신 선수가 총 4명으로 늘었다.
아이스하키는 공격수 3명과 수비수 2명, 그리고 골리를 포함해 총 6명이 링크에서 뛴다. 워낙 체력소모가 심해 22명(플레이어 20명, 골리 2명)의 엔트리로 경기에 참가해 필요할 때 마다 교대로 뛴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자국가대표팀은 21명, 아직 22명의 엔트리를 채워본 적이 없다.
박 선수의 지금 당장의 목표는 평창 올림픽에 앞서 다음 달 강릉에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거다. 여자대표팀은 현재 세계선수권 디비전 2그룹 A, 소위 4부 리그에 속해 있는데 지난 삿포로에서 거둔 성적을 발판 삼아 여기서 우승해 상위 리그에 진출하는 게 목표다.
그 다음엔 스포츠의학 분과전문의가 목표
그러고 나면 의학원에 잠시 복귀해 중단했던 2년 차 과정을 마치고 9월에 다시 올림픽 준비를 위해 돌아올 예정이다. 올림픽이 끝나고 나면 다시 의대로 돌아가 나머지 과정을 밟을 계획이다.
지금으로선 스포츠의학에 관심이 많아 정형외과를 전공할 생각이다. 그러려면 남은 2년을 마친 후에도 4년간의 전공의 과정과 세부전공을 위한 전임의 과정 2년이 아직 남아 있다.
박 선수는 올림픽 후에는 의대를 졸업하고, 다른 부분에서 대표팀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이다. 그래서 대표팀 선수들과는 의사가 되면 팀 닥터를 하겠노라고 농담을 주고 받기도 한다.
사실 아이스하키는 동계올림픽의 꽃이라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인기가 높은 겨울 스포츠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대표팀 경기는 TV에서 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관심이 낮다.
그런데 지난 달 초 여자아이스하키 ‘전주한옥마을팀’이 창단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 동안 국가대표팀을 제외하고는 전무후무했던 여자아이스하키에 이제 작은 관심이 하나 둘 시작되는 걸까?
여자대표팀은 평창동계올림픽 주최국으로서 올림픽 본선 진출권을 처음 획득했다. 세계적인 피겨선수 김연아가 피겨스케이팅, 더 나아가 동계스포츠에 대해 끌어올린 국민적 관심이 아이스하키에도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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