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이제는 조용히 관찰할 뿐입니다. 쓰나미가 오기 전 바다가 저만치 물러가고 오히려 조용해진다고 합니다. 그 적막 속에서 저 멀리 산 높이의 파도가 덮쳐오는 것을 바라보며 굳어버린 모습에 가깝습니다.
요즘은 병원 경영이 어렵다는 이야기, 마이너스 통장 이야기가 오히려 잘 들리지 않습니다. 정말 직원 월급을 못 주게 되는 상황이 되면서 병원 내부와 사회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그 심각성을 감추는 듯 합니다. 치료 시기를 놓치고 있는 중증 환자들, 병원과 관련 업계 회사들의 부도, 직원들의 실직, 무엇보다 정부가 의료개혁의 목표라고 했던 필수의료∙지역의료와 군의료∙격오지 공중보건의료의 비가역적 몰락 등의 쓰나미를 앞두고 도망칠 방법도 없을 때 무슨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최근 나왔던 서울고등법원 판결에 대한 보도자료 중 ‘항고심 결정의 요지’에서 오히려 이 나라 의료를 걱정하는 지식인의 고뇌가 느껴졌습니다. 행정부가 총동원돼 온 나라를 휩쓰는 의료 농단의 압력을 판사 홀로 맞서기는 애당초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그래도 그 과정에서 의대증원 과정이 터무니 없는 졸속으로 진행됐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릴 수 있어서 감사했고, 행간에는 판사가 아니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사태의 해결을 바라는 마음까지 담겨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말주변도 없는 제가 언론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도 하고 글도 썼던 것은 미력하나마 우리나라 의료가 완전히 망가지는 것을 막아보려는 발악같은 것이었고, 저는 그것이 20년 이상 이 땅에서 의사로서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살아왔던 교수라면 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공의와 학생을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또한 필수의료로 분류되는 과의 의사로서, 제가 좀 더 잘 알고 있는 부분이 있기도 해서 더욱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정부는 확실히 법전문가들이 많아서인지 의대증원과 반대 의견을 묵살하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잘 진행했습니다. 정부가 소송과 면허정지, 온갖 명령으로 법 몽둥이를 휘두르니, 전공의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사직을 했고 이제는 ‘대화의 장으로 나오라’고 할 대상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겁박이 심해질수록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원칙만 남아 저항의 대오는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정부가 바라는, 4년 전에 그랬듯, 전공의 일부가 들어오면서 대오가 와르르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전공의들은 강력한 집행부가 있는 게 아니고, 전체 행동의 방향을 투표로 결정한다고 하지만 애당초 투표를 시작할 명분도 없는 상태입니다. 4년 전 의대생들이었던 전공의들은 당시 전공의들이 의대생만 남기고 와르르 복귀한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기도 합니다.
의대생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직 의대생만을 위해 대학의 학칙을 맞춤 개정해 유급 시기를 늦춘다고 한들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 부조리한 의료농단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이 의사로 살아갈 평생을 암울하게 만들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기에, 그들은 지금 1년을 감수해야만 할 희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상 초유의 전체 의대생 1년 유급(휴학) 사태를 막을 방법은 없어 보이나, 그 파장을 충분히 분석하고서 이번 사태를 일으켰는지에는 의문이 듭니다.
전임의가 70% 돌아왔다는 것 정도로 희망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 수는 기껏해야 수백명인 반면에 지금 병원을 나간 전공의는 1만 2000명이 넘습니다. 대학병원은 애당초 저수가에 극도의 효율성으로 운영해야 겨우 생존할 수 있던 곳이었습니다. 빅5 는 잉여금을 쌓아놓기도 했다지만, 큰 병원인 만큼 의료수익의 40% 를 넘어가는 인건비를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은 길 수 없습니다. 1만 여 전공의의 빈자리는 무엇으로도 메꿀 수 없습니다. 전세기? 외국 의사? PA 간호사?
이제 전공의와 의대생들이 자신들이 갖고있던 파괴력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옵니다. 그들은,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악마화되고 자율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공공재 취급을 받았던 울분을 풀기 위해서라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 의료의 미래를 겁박하고 국민과 의사들을 갈라놓았던, 정부의 잘못된 정책이 불러 올 후과를 정산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국립대학병원에 큰 세금이 투입될 것이고, 사립병원은 문을 닫는 곳이 나올 것이고, 사회 소요가 일어날 것입니다. 1년의 시간 동안 전공의 없이 버틸 수 있는 대학병원이 몇 군데나 될지 정말 궁금합니다.
현 정부의 정치력에 의문이 생깁니다. 4년 전 400 명 정원의 공공의대를 1년 만에 만들어내겠다고 해 시작한 ‘젊은 의사 단체행동’ 때 정부는 훨씬 교묘하게 접근했습니다. 수도권과 지방, 간호사와 의사, 젊은 의사와 기득권 의사, 입장이 다른 점을 잘 알고 갈라 치는 정책과 발언이 많아 쉽게 자중지란에 빠져들곤 했습니다. 당시의 성급한 결말도 상당히 깊은 상처를 남겼기에 의사들의 투쟁은 항상 분열로 끝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지금의 정부는 무슨 말을 해도 의사들 간에 토론거리조차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르면서 정책을 집행하나? 하고 놀랄 뿐입니다.
2000명? 전세기? 외국 의사? 무크 방식의 온라인 강의? 이제는, 다 정해졌으니 돌아와서 전공의 처우개선에 대해 논의해 보자고도 합니다. 3만 명 의대생∙전공의들의 1년을 멈추게 할 위대한 정책을 실행하는 분들이 현실을 이렇게도 모를 수가 있습니까? 이 땅의 의사로서 틀린 정책에 대해서는 틀렸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으로 평생을 교육받고 살아온 전문직업인이라면, 온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는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책임방기이며, 저항은 의무입니다.
돌이켜보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4월 1일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에서 2천 명은 과학적 추계이며 필요한 최소한의 숫자라고 말했을 때, 이 나라 의료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었습니다. 검사의 주장은 재판정에서 꺾일 수 있어도,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국민 앞에서 공표했을 때 이미 정치와 타협의 여지가 없어졌습니다.
의대 정원은 행정부의 결정이며 책임이라는 말은 맞겠지요. 의사들도 책임을 갖고 환자에게 약을 처방합니다만, 처방하는 모든 약이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 같은 약이어도 용량에 따라서 독약이 되기도 하니 조심스럽게 써야한다는 점을 알고 신중하게 처방합니다.
“The buck stops here.”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그러나 충분한 배경지식이나 논의없이 졸속으로 정책을 밀어붙이는 정부에서 저 말을 사용했을 때, 환자와 의사, 국민들은 공포를 느낍니다. 정부는 의료계가 아무리 저항해도 의대 정원을 둘러싼 싸움에서 승리할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 승리의 결과 우리 나라의 의료가 붕괴되고 온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게 됐다는 황당한 결말에 이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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