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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건복지부에 보내는 정책제언...의료개혁, 나침반이 될 네 가지 원칙

    [칼럼] 김재연 대한의사협회 법제이사

    기사입력시간 2025-10-04 09:15
    최종업데이트 2025-10-04 09:15

    보건복지부 정은경 장관 주재 위기상황대응본부 회의. 사진=보건복지부 
    [메디게이트뉴스] 정은경 장관이 이끄는 현 보건복지부는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신뢰의 위기 속에서 의료개혁이라는 험난한 항해를 시작했다. ‘방역 영웅’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하게, 장관이 마주한 것은 바이러스가 아닌 정책의 방향성 자체를 불신하는 의료계의 냉담한 시선이다.
     
    취임 한 달이 지난 지금, 정부의 정책들은 단기적 여론에 기댄 미봉책과 근본적 해결을 외면한 임시방편 사이를 표류하고 있다. 이 위기를 타개하고 대한민국 의료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 정부가 나침반으로 삼아야 할 네 가지 대원칙을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절차적 정당성을 상실한 의대 증원은 전면 무효화하고, 과학적 거버넌스를 재구축하라.
     

    정부가 고수하는 '2025학년도 2000명 증원'은 과학적 근거, 적정 절차, 사회적 합의라는 정책의 기본 요건을 모두 상실했다. 시작부터 잘못 꿰어진 첫 단추다.
     
    정부는 '수급추계위원회'를 가동하며 대화의 제스처를 취했지만, 이는 2027년 이후를 논하는 위원회일 뿐, 당장 의료 시스템의 근간을 흔들 2025년 증원이라는 거대한 구조적 모순을 애써 외면하는 것에 불과하다. 단순히 의사 수를 늘리면 필수의료와 지역의료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발상은 수도관이 낡아 곳곳에서 물이 새는 상황에서 수압만 높이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과 같다.
     
    나침반의 첫 번째 방향은 명확하다. 2025학년도 증원 계획을 ‘중단’이 아닌 ‘완전 무효화’하고, 의료계와 정부, 외부 전문가가 동수로 참여해 법적 구속력을 갖는 ‘(가칭)미래의료인력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 이 기구를 통해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하여 인력 수급을 논의하는 것만이 절차적 정당성을 회복하고 사회적 신뢰를 얻는 유일한 길이다.
     
    둘째, 필수의료의 토양을 살리려면 ‘수가 구조 정상화’와 ‘법적 보호’가 선행돼야 한다.
     

    정부가 제시한 '5년간 10조 원 이상 투입' 계획은 그 의지는 평가할 만하나,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식이라 볼 수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식의 재정 투입은 왜곡된 수가 구조를 더욱 기형적으로 만들 뿐이다.
     
    생명과 직결된 분야가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가에 신음하는 구조를 외면한 채 몇몇 항목의 수가를 올리는 것은 진정한 해법이 아니다.
     
    이 구조적 모순이 낳은 대표적인 문제가 바로 ‘검체검사 위탁기관 할인’ 관행이다. 정부는 이를 불법 리베이트로 규정하고 처벌하려 하지만, 이는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처사다. 이 관행은 의사의 진찰 행위와 검체 관리·해석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원가조차 보전하지 못하는 기형적인 저수가 체제 속에서 1차 의료기관이 생존을 위해 찾아낸 고육지책에 가깝다.
     
    나침반의 두 번째 방향은 ‘원인 진단과 근본 치료’다. 불법으로 낙인찍고 처벌하기에 앞서 진찰료와 검체 관리료 등 저평가된 기본 행위 수가를 먼저 현실화해야 한다. 정당한 보상 체계가 확립되면 이러한 비정상적 관행은 자연히 소멸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선의의 의료행위를 보호할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이 반드시 병행돼야만 필수의료의 토양이 비로소 건강해질 수 있다.
     
    셋째, ‘성분명 처방’은 의사의 전문성과 환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포퓰리즘이다.
     

    정부와 일부 정치권은 건강보험 재정 절감을 명분으로 '성분명 처방' 도입을 꾸준히 시도하고 있다. 이는 의사가 약의 성분만 처방하고, 특정 브랜드의 약을 선택하는 것은 약사가 하도록 하는 제도다.

    그러나 성분명 처방은 환자의 안전과 치료의 질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같은 성분의 약이라도 미세한 첨가물 차이, 제조 공법의 차이에 따라 약효나 부작용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환자의 미묘한 상태 변화까지 고려하여 가장 적합한 약을 선택하는 것은 의사의 고유한 전문 영역이자 환자에 대한 책임의 최종 단계다.
     
    나침반의 세 번째 방향은 ‘전문가 책임의 원칙 수호’다. 성분명 처방은 처방의 책임은 의사에게, 약 선택의 권한은 약사에게 부여해 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이는 재정 절감이라는 미명 하에 의사의 전문성을 거세하고 이로 인한 잠재적 피해를 국민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환자의 건강은 비용 절감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의사의 처방권은 환자에 대한 책임과 동의어임을 정부는 명심해야 한다.

    넷째, 신기술과 직역 갈등의 해법은 ‘환자 안전’과 ‘면허 체계의 엄격성’에 있다.
     

    비대면 진료와 한의사 현대 의료기기 사용 문제는 대한민국 의료의 근간인 면허 시스템과 환자 안전에 직결된 사안이다.
     
    비대면 진료는 대면 진료를 보완하는 보조적 수단이어야 하며, 그 중심에는 반드시 환자를 지속적으로 관리해 온 동네 의원이 있어야 한다. 플랫폼 기업의 이익이 국민의 건강보다 우선시되어 초진이 무분별하게 허용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다.
     
    최근 법원의 한의사 엑스레이 사용 무죄 판결 역시 의료법의 대원칙을 흔드는 심각한 사태로, 정부의 즉각적인 행정적 조치가 필요하다.
     
    나침반의 네 번째 방향은 ‘원칙의 재확립’이다. 비대면 진료는 재진 환자 중심, 의원급 의료기관 위주라는 원칙을 법제화해 상업화를 차단해야 한다. 또한 정부는 즉각적인 유권해석과 시행령 개정을 통해 한의사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이 명백한 무면허 의료행위임을 천명하고,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행정적 책무를 다해야 한다.
     
    정은경 장관은 단기적 갈등 봉합이라는 유혹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의료의 백년대계를 설계한다는 사명감으로 정책에 임해야 한다.
     
    의료계가 제시한 이 네 가지 나침반의 방향은 특정 직역의 이익을 위함이 아닌, 국민 모두를 위한 가장 안전하고 올바른 길이다. 장관이 표류하는 정책의 키를 바로잡고, 원칙과 상식에 기반한 리더십을 보여주길 기대한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