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조운 기자] 정부가 의대 정원 증원과 동시에 의사과학자 양성과 '한국형 ARPA-H 프로젝트' 구축 등을 국정과제로 선정해 지원을 강화한다고 밝혔지만 의학계는 선진국형 의학연구체계 구축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기초의과학에 대한 소외 속에 고질적인 부처 간 칸막이로 분산된 R&D 예산은 우리나라의 기초의과학을 성장시키기게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31일 대한민국의학한림원이 고대의료원에서 개최한 기초의과학 포럼에서 이같이 지적했다.
즉각적 성과 내지 못하는 기초의학 소외…"의학 연구 기반 강화 못한 의학계도 반성해야"
이날 왕규창 한림원장은 개회사에서 "우리나라는 빠른 시간에 세계적인 수준의 임상의학 수준을 높였지만 상대적으로 기초의학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투자를 요하는 기초의학은 당장 부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한계로 인해 소외되고 위축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더욱이 한동안 기초의학자들이 임상의학을 낮은 수준의 의학이라 폄훼하는 분위기도 있어 기초의학과 임상의학의 협력이 부족한 상태가 됐고, 임상의학자들은 기초의학과 협력하기보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비의학 기초과학과 협업하면서 기초의학은 의학으로서 정체성마저 흔들리는 때가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왕 원장은 "문제는 의학계 내부에 국한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된 의학 연구에 대한 정부 지원은 각 부처마다 분절적으로 시행됐고, 부처 간 힘겨루기가 이뤄졌다. 미국과 열국, 일본이 부처의 벽을 허물고 대규모 의학 연구를 조직적, 균형적, 효율적으로 전개한 것과 사뭇 다른 형태"라며 "최근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과 한국형 ARPA-H 프로젝트 사업이 진행되는 것은 개선의 신호로 인지되나 과연 선진국처럼 의학 연구 체계가 발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은 여전하다"고 지적했다.
왕 원장은 이러한 현실에서 의료계 역시 반성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의학계에는 꾸준히 의학 연구 기반 강화를 위해 노력해 온 조직도, 전략도 없었다. 국가에서 한의학연구소는 만들었어도 국가 차원의 의학연구소는 만들지 않았다. 한의계는 꾸준히 연구에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없었기 때문"이라며 "의학한림원이 약 8년 만에 의학연구 기반 강화 특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기초의학뿐 아니라 의학계 전체의 뜻을 모으고 우리 사회 우군을 확보하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하나 정진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과기부, 복지부, 산자부, 교육부 4개 부처 연구비 모아 관리해야…한국형 NIH 필요
이어 '국내 기초의학 기반강화의 당위성'에 대해 발표에 나선 한희철 한림원 부원장(고려의대 명예교수)은 "우리나라에는 과학에 대한 국가 정책이 없다"며 "정부 내에 국가 과학 정책을 수립하거나 집행할 책임이 있는 기관이 없고, 중요한 주제에 전념하는 의회나 상임위원회도 없다. 이제 과학을 무대의 중심으로 가져와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 부원장은 미국의 예를 들며 "미국은 의학 연구에 미국 전체 과학 연구비의 5배를 쏟아붓고 있다. 그런 노력 덕분에 미국은 코로나19 백신을 만들 수 있었다. 투자가 없으면 이 연구 경쟁에서 이기기 어렵다"며 “특히 미국은 임상 연구와 기초연구가 거의 50대 50의 비중을 두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우리나라 의학 연구의 현실을 보면 2023년도 전체 과학 연구비 중 의약학 연구비 점유율은 약 21%다. 미국과 비교해 터무니없는 수준이다.
의약학 연평균 연구비는 6000만원 내외에 불과하고, 실신청 연평균 직접비는 4800만원으로 열악한 연구 환경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한 부원장은 “의학 연구의 사령탑이 부재하다는 점도 문제다. 미국은 보건의료 관련 R&D를 단일한 부처인 NIH를 통해 관리하지만 우리나라는 과기부, 복지부, 산자부, 교육부 등 4개 부처로 보건의료 R&D가 흩어져 있다. 중복되기도 하고 효율성도 떨어지며 의학 연구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말했다.
한 부원장은 "의학 연구는 미래 산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기초의학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과학으로서 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의료계와 과학계의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연구재단의 예산이 정해져 있어서 학계가 파이를 나눠가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라며 "일본이 3개 부처의 연구비를 모아 일본의료연구개발기구(AMED)를 만들었듯이 한국형 NIH(미국 국립보건원) 설립을 목표로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