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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가 아닌 간호사, 간호조무사로 하여금 약을 조제하게 한 중소병원에 대해 보건복지부가 업무정지 108일 처분을 내렸고, 법원도 이 같은 행정처분이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일부 대형병원을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의료기관들이 무자격자 조제를 할 수밖에 없어 복지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 걸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원장들은 업무정지처분을 각오하고 진료를 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 놓여있다.
서울행정법원은 3일 지방의 K병원이 복지부를 상대로 청구한 업무정지처분 취소소송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K병원의 업무정지처분 사유는 크게 3가지로 ▲식당 직영가산 부당청구(5억 1525만원) ▲무자격자가 제조한 후 약제비 부당청구(17억 7358만원) ▲응급실 알바 근무 후 응급의료관리료 부당청구 1349만원 등이다.
이 중 핵심 쟁점은 무자격자 조제.
이 병원은 2007년 7월부터 2011년 2월까지 약사가 아닌 간호사 등의 무자격자들로 하여금 약을 제조하게 하다가 적발됐다.
사건 당시 의료법 시행규칙은 연평균 1일 조제건수가 80건 이상이면 약사를 두도록 했다.
K병원의 하루 평균 원내조제 건수는 50건 미만.
이 병원은 법적으로는 약사를 두지 않아도 되지만 주3일 근무하는 조건으로 파트타임 약사를 채용했다.
의료법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해당 약사가 근무하지 않는 날과 야간에는 간호사, 간호조무사의 조제가 불가피했다.
K병원은 내부자고발로 수사를 받았고, H원장은 약사법 위반, 사기죄로 기소돼 2013년 대법원에서 2000만원 벌금형이 확정됐다.
또 건강보험공단은 무자격자 조제에 따른 약값과 조제료 등 17억 6천여만원을 환수했고, 보건복지부는 요양기관 업무정지(건강보험환자 진료금지) 108일, 의료급여 업무처분 79일 처분을 통보하고 나섰다.
그러자 이 병원은 업무정지처분 취소소송과 함께 1심 판결이 선고될 때까지 업무정지처분을 유예해 달라는 취지의 집행정지신청을 했지만 법원이 기각했다.
이 때문에 이 병원은 지난 9월 200여명의 환자들을 다른 병원으로 전원 시키고, 상당수 직원들은 퇴사했다.
사실상 파산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무자격자 조제가 K병원을 포함한 일부 중소병원만의 문제일까?
약사 정원을 정한 의료법 시행규칙에 따르면 상급종합병원은 연평균 1일 입원환자를 30명으로 나눈 수와 외래환자 원내조제 처방전을 75매로 나눈 수를 합한 수 이상의 약사를 채용해야 한다.
예들 들어 연평균 1일 입원환자가 600명이고, 외래환자 원내조제 처방전이 150매라면 22명의 약사를 채용해야 한다는 의미다.
종합병원 중 500병상 이상은 연평균 1일 입원환자를 50명으로 나눈 수와 외래환자 원내조제 처방전을 70매로 나눈 수의 합 이상, 300병상 미만은 1인 이상의 약사를 채용해야 한다.
이보다 규모가 작은 병원급 의료기관은 1인 이상의 약사를 두되, 100병상 이하는 주당 16시간 이상의 시간제 근무 약사를 둘 수 있다.
보건산업진흥원이 펴낸 ‘2014 병원경영분석'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 전체 병원의 100병상 당 약사 수는 1.2명.
100병상 당 상급종합병원은 3.2명이지만 그 이하 규모의 종합병원은 0.8~1.7명, 병원은 0.8명이다.
약사가 24시간 365일 약을 조제하기 위해서는 중소병원이라고 하더라도 최소 5~6명이 근무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의료기관들이 무자격자 조제로부터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정부가 적정 수준의 약사를 채용할 정도의 수가를 보존해주는 것도 아니다.
K병원이 한달 평균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받는 조제료는 280만원에 불과하다.
1명의 약사 월급도 되지 않는 수준이다.
삼육대 약학과 송영천 교수가 지난해 병원약사회가 발간하는 잡지에 기고한 '수가체계 내에서의 병원약제 업무의 위치 및 가치평가' 연구보고서를 보면 병원약국의 조제료는 동네약국의 27.5%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현재 병원의 시스템은 약사법과 충돌하는 측면이 있다.
H원장은 "약사법으로 의사의 조제권과 간호사의 조제보조권을 제약하면 약사가 24시간 병동에 상근하지 않으면 의사의 의료행위가 불가능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현실에 맞지 않는 약사법, 다수의 약사를 채용할 수 없는 조제수가는 의료기관과 원장들을 예비범죄자로 전락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