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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위에서 사라지는 생명들, '소프트웨어' 혁신 없이는 분만 인프라 부활 없다

    [칼럼]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

    기사입력시간 2026-05-03 16:41
    최종업데이트 2026-05-03 16:41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필수의료의 붕괴는 단순히 통계상의 수치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신뢰의 붕괴이며, 한 국가가 공동체의 미래를 포기하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경고음이다. 

    최근 충북 청주에서 발생한 고위험 산모의 태아 사망 사건은 대한민국 분만 인프라가 얼마나 처참하게 무너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길 위에서 아이를 낳아야 하고, 수용 가능한 병원을 찾지 못해 골든타임을 놓치는 나라에서 감히 '저출생 극복'을 논할 수 있겠는가.

    하드웨어는 있지만 '운용 인력'이 없다

    정부는 그간 분만 취약지 지원사업과 병상 확충 등 '하드웨어' 중심의 대책을 내놓았다. 하지만 현장의 목소리는 다르다. 현재 연간 300건 이상의 분만을 수행하는 기관은 전국적으로 약 230곳이며, 신생아 중환자실(NICU)을 운영하는 병원은 100여 곳에 불과하다.

    더 심각한 것은 산과와 신생아과의 '불균형'이다. 산과 전문의가 있어도 신생아 전문의가 없으면 고위험 산모를 받을 수 없고, 역으로 NICU는 비어있어도 분만을 담당할 산과 의사가 당직을 서지 못해 전원을 거부하는 사태가 비일비재하다. 병원은 존재하되, 시스템을 돌릴 '사람'이 없는 기형적인 구조가 고착화된 것이다.

    이송 효율화와 법적 보호라는 '소프트웨어' 혁신이 시급하다

    이제는 정책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전환해야 한다. 단순히 시설을 짓는 단계를 넘어, '이송 효율화와 법적 부담 완화라는 '소프트웨어 혁신''이 병행되어야 한다.

    첫째, 산과 및 신생아과 전문의를 '국가 필수 전략 인력'으로 지정해야 한다. 개별 의료기관의 희생과 헌신에만 의존하는 당직 체계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 국가가 이들의 인건비와 관리 체계를 직접 지원하고, 지역 내 거점 병원과 상급병원이 실시간으로 연계되는 강력한 컨트롤타워를 구축해야 한다.

    둘째, 의료사고에 대한 국가 책임제가 실질적으로 작동해야 한다. 고위험 분만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사고를 내포하고 있다. 

    결과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의사에게 과도한 형사 책임을 묻고 억대의 배상금을 지우는 현실에서, 어떤 젊은 의사가 산과를 선택하겠는가. 최근 개정된 의료분쟁조정법이 현장에서 체감되기 위해서는 불가항력적 사고에 대한 100% 국가 보상과 형사처벌 면제라는 확실한 안전장치가 담보되어야 한다.

    셋째, 미숙아 관리, 정부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 

    지역 취약지 산모들이 안심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려면, 분만 이후의 미숙아 관리까지 정부가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방향으로 사업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 지자체와 정부가 협력하여 고위험 산모와 신생아를 위한 촘촘한 의료망을 구축하지 않는다면, 지방의 분만 병원은 계속해서 사라질 것이며 이는 곧 수도권 의료 과부하와 필수의료 고사라는 도미노 현상을 불러올 것이다.

    필수의료의 마지막 보루인 산과가 무너지면 대한민국에 내일은 없다. 우리는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 정부와 정치권은 이번 사태를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 보여주기식 대책이 아닌 의료진이 안심하고 진료실을 지킬 수 있는 근본적인 소프트웨어 개선에 즉각 나서야 한다.

    더 이상 '길 위의 비극'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