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키워드 순위

    메디게이트 뉴스

    호남권 이송체계 시범사업, 응급실 강제 배정 ‘지침’보다 ‘법률적 면책’이 먼저다

    [칼럼] 김재연 대한의사협회 법제이사 대한산부인과의사회장

    기사입력시간 2026-02-26 12:04
    최종업데이트 2026-02-26 12:04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최근 정부는 ‘응급실 뺑뺑이’를 근절하겠다며 오는 3월부터 호남권(광주·전남·전북)을 대상으로 ‘응급이송체계 혁신 시범사업’을 강행한다고 발표했다. 

    핵심은 명확하다. 119 구급대 대신 광역상황실이 병원을 직접 지정하고, 중증 환자의 경우 ‘거리’를 기준으로 인근 병원에 강제 배정하겠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효율적인 이송처럼 보이지만, 현장의 의사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정부는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하지 말라'며 압박하고 사고 시 '법적 책임을 경감해 주겠다'는 달콤한 약속을 내걸었다.
     
    그러나 묻고 싶다. 보건복지부의 ‘행정 지침’ 한 장이 과연 서슬 퍼런 사법부의 칼날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가?
     
    ‘지침’은 ‘법’을 이길 수 없다
     
    우리 의료 현장은 이미 한계치다. 배후 진료 인력이 없고 수술실이 포화 상태임에도 상황실의 지시라는 이유로 환자를 수용했다가 예후가 불량할 경우, 그 책임은 누가 지는가?
     
    판사는 복지부의 지침을 근거로 무죄를 선고하지 않는다. 현행 응급의료법과 의료법, 그리고 대법원의 엄격한 판례는 여전히 의사 개개인의 ‘주의 의무’ 와 ‘과실’을 따질 뿐이다. 실제로 최근 호남권에서 발생한 여러 사례는 이 같은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보여준다.

    분만 중 태반조기박리로 촌각을 다투는 산모를 NICU(신생아 중환자실)가 만석인 병원에 강제 배정한다면, 그것은 ‘구조’인가 아니면 ‘동반 자살’인가? 신생아를 살릴 공간이 없는 상태에서 환자를 받았다가 비극적인 결과가 초래된다면, 그 형사 처벌과 수억 원의 민사 배상은 고스란히 현장 의사의 몫이 된다.
     
    법적 근거 없는 시범사업은 중단돼야 한다 정부가 진심으로 응급의료 체계를 혁신하고자 한다면, 현장의 희생을 강요하기 전에 ‘법적 방패’부터 마련해야 한다.
     
    첫째, 응급의료법상 ‘형사 면책’의 명문화가 시급하다. 상황실의 배정에 따라 수용 능력을 초과해 환자를 받은 경우, 고의나 중과실이 없는 한 형사 책임을 완전히 면제해야 한다.
     
    둘째, 민사 배상 책임의 국가 배상제 도입이다. 국가가 진료를 강제했다면 그 결과에 대한 배상 역시 국가가 책임져야 마땅하다. 의사가 피고석에 앉아 수년간 삶이 파괴되는 과정을 국가가 방치해서는 안 된다.
     
    셋째, ‘수용 불가 사유’의 객관적 인정이다. 인력 부족과 시설 한계는 ‘핑계’가 아니라 ‘팩트’다. 이를 무시한 배정 명령은 그 자체로 원천 무효가 돼야 한다.
     
    의사는 ‘응급실 뺑뺑이’의 주범이 아니라 피해자다. 붕괴된 필수의료 인프라를 그대로 둔 채, 이송 단계에서 병원을 강제로 찍어 누르는 것은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격이다. 특히 산부인과와 같이 고위험 분만을 다루는 영역은 더욱 처참하다. 지역 산부인과들은 거대 자본의 불공정 거래와 정부의 고압적인 정책 사이에서 고사 직전이다.
     
    정치권과 보건당국에 강력히 촉구한다. 법률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시범사업 강행은 현장 의료진에게 ‘사법적 자살행위’를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
     
    의사를 잠재적 범죄자로 만드는 강제 배정 정책에 앞서, 의료진이 안심하고 환자를 받을 수 있는 ‘법적 면책’과 ‘공적 배상 체계’를 법률로 명문화하라. 그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장 의료진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대응할 것이다.
     
    의료진의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응급실에 환자의 안전이 있을 리 만무하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현장의 절규를 직시해야 한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