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이지원 기자] 죽음은 각 시대와 문화, 제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여진다. 현대 사회에서 의료진은 죽음을 앞둔 환자를 가장 먼저 마주하고, 가까이에서 돌보며, 고통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뿐 아니라 환자와 가족이 삶의 마지막 순간을 존엄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맡는다. 특히 안락사와 조력자살 등 인위적 죽음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면서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이해하고 동행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커지고 있다.
이에 한국정신종양학회는 지난 13일 중앙대병원 중앙관에서 열린 제15회 춘계학술대회 및 연수교육에서 '죽음의 인문학적 이해'를 주제로 세션을 열고, 인류학·사회심리학·정신의학 관점에서 죽음을 고찰했다.
한국정신종양학회는 암 환자와 가족의 정신 건강 및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설립된 학술 단체다. 암 환자의 심리사회적 지지 및 치료 연구, 교육, 임상 활동 등을 통해 암 환자와 가족의 정신 건강 증진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사장은 울산의대 서울아산병원 정석훈 정신건강의학과 교수가 맡고 있다.
이날 세션에서 ▲송병기 의료인류학자는 '안락사에 대한 인류학적 고찰'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한민 교수는 '문화와 죽음: 죽음에 대한 태도의 문화 차이' ▲서울의대 정신건강의학과 박혜윤 교수는 '죽음과 윤리: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인간의 선택'을 발표했다.
삶의 마지막을 대하는 태도는 시대와 문화, 제도와 가치관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 한국의 장례문화는 전통적으로 떠들썩한 의례였으나, 최근에는 죽은 뒤 나를 기억해줄 사람조차 없는 시대다.
이에 한민 교수는 "죽음을 둘러싼 사회적 연결성과 감각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라며 "죽은 뒤 나를 기억해줄 사람이 없는 시대가 왔다. 죽음은 단절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과 연결의 방식이어야 한다"고 했다.
박혜윤 교수 역시 "자연스러운 죽음은 삶의 맥락 속에서 인간다운 관계를 유지해 맞이하는 것"이라며 생의 마지막이 단절이 아니라 의미를 정리하고 관계를 마무리하는 시간이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다르다. 병원 시스템이 모든 것을 대신하는 상황에서 환자는 관계로부터 단절되고, 그가 속한 공동체로부터 격리돼 주변화한다.
박 교수는 "과거에는 죽음이 한 생명의 종결이었으나, 현대 사회에는 말기와 임종 과정이 의료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임종의 모습이 국가가 정한 법과 제도, 병원이 제공하는 치료 시스템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이에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윤리의 필요성이 커졌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말기 환자가 느끼는 존엄성 상실은 단지 신체 기능 저하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 데서도 기인한다"며 "좋은 죽음은 근본적으로 기술이나 제도만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완성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생명의 탄생과 소멸이 자연스럽게 순환하고, 죽음을 실패가 아닌 하나의 이행으로 받아들이는, 서로 돌보는 관계가 살아있는 공동체"라고 했다.
안락사는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는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현재 일부 국가가 안락사·의사조력자살 등을 합법화하고 있으나, 제도와 절차, 접근 방식은 다르다.
스위스는 자발적 의사조력자살을 허용하지만, 해당 절차는 비영리단체가 주도하며 신청자의 건강 상태와 정신력, 판단 능력을 수개월에 걸쳐 평가한다. 미국은 10여개 주에서 의사조력자살이 합법이나, 약 처방은 허용하되 처방·조제 기관은 공개하지 않는다. 환자 스스로 병원과 약국을 찾아야 하는 이 제도는 정보 접근성과 경제적 자원에 따라 실현 가능성이 달라진다. 네덜란드는 환자와 주치의의 관계를 기반으로 연속적인 돌봄을 제공한 뒤, 의료적·정서적·가족적 지원이 모두 이뤄졌다는 전제에서만 마지막 수단으로 안락사를 허용한다.
합법화에 대한 움직임은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하원은 지난달 조력 사망을 합법화하는 법안과 말기 환자의 통증과 고통을 줄이기 위해 시설이나 가정에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호스피스(임종 간호)에 대한 권리를 확립하는 법안을 통과했으며, 미국 뉴욕주도 안락사 허용 법안 통과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안락사가 불법이지만, 2018년 '연명의료결정법'을 통해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등 말기 돌봄을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적용 범위가 제한적이라는 단점이 있다. 법은 '임종기'라는 좁은 시점을 기준으로 연명의료 중지를 허용하고 있어, 연명의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실제 행사하기 어렵다. 고통 완화 조치의 일환인 호스피스완화의료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의 호스피스완화의료는 현재 암,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간부전, 만성호흡부전 등 5개 질환에만 적용된다.
송병기 의료인류학자는 "안락사는 단일한 제도로, 수입 가능한 기술이 아니다"라며 "각 사회가 어떻게 고통에 응답하고, 어떤 죽음을 존엄하다고 여기는지에 따라 형식이 달라진다"고 설명했다.
이어 안락사 등 인위적 죽음은 본질적으로 타인과 제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며, 이 과정에서 의료진의 개입은 필연적이라고 언급했다.
송 의료인류학자는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행위를 할 때의 자기결정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환자 죽음에는 제3자가 무조건 개입해야 한다"며 "자율적인 죽음을 위해서조차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가 존엄하다고 믿는 죽음은 법이나 도덕의 정답이 아니다. 사회가 고통에 어떻게 응답하는가의 문제다"라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