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제약협회의 '리베이트 무기명 설문조사(비밀투표)'는 빈약한 근거를 기반으로 한다는 한계를 안고 시작했다.
제약사 오너들이 분기마다 열리는 제약협회 이사회에 모여, 리베이트 '의심' 제약사를 비밀용지에 적어내는 방식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이 조사의 기저엔 소위 'fact'가 배제돼 있다.
그런 무기명 설문조사를 강행한 제약협회의 논리는 첫 째도 리베이트 근절 의지, 둘 째도 근절 의지였다.
많은 제약사들이 무기명 설문조사를 반대했지만, 협회는 '다수 지목받는 제약사의 오너가 창피해서라도 혹은 소문나는 게 겁나 리베이트를 자제하지 않겠냐'며 오히려 수위를 높였다.
협회는 설문조사 결과를 비공개하던 기존 방식을 버리고, 오는 28일 열릴 이사회부터 다수 지목된 회사 2~3곳의 이름을 현장에서 공개키로 했다.
이쯤되면 무기명 설문조사는 그 효과 유무를 떠나, 제약협회의 강력한 자정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성으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런 제약협회가 14일 돌연, 28일 예정된 이사회와 무기명 설문조사를 3분기로 연기했다.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는 게 그 이유다.
제약협회에 따르면, 복지부는 오는 30일 '혁신형제약기업 인증서 수여식'을 열고 제약·바이오 산업 육성 지원 방안을 발표한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제약·바이오 산업을 '신산업'으로 지정해 제도 지원을 약속하는 한편, 정부 주도로 운영된 약가제도개선협의체의 긍정적인 논의 결과도 이날 발표될 예정이다.
정부가 지원 악셀레이터를 밟는 이 시기에, 무기명 설문조사를 포함한 리베이트 이슈가 제약산업의 긍정적인 측면을 모두 덮어버릴까 우려해 잠시 미룬다는 게 제약협회의 설명이다.
제약협회 관계자는 "잠시 연기하는 것일 뿐 무기명 설문조사 시행 및 리베이트 근절의지에는 변함이 없다. 차기 이사회에서 반드시 진행할 것"이라며 "리베이트 이슈는 화제성이 강해 좋은 이슈를 덮는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시기를 늦추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번 결정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윤리경영에 대한 강력한 의지로 '무기명 설문조사 결과 내부 공개'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면, 정치적 판단과는 별도로 '내부 공개'를 진행해야만 제약사들에 전하는 메시지가 뚜렷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리베이트 이슈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는 지금, 오히려 설문조사 시기를 늦추는 것은 결국 정부에 보여주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던 게 아니냐는 비난도 나온다.
국내 제약사 관계자는 "사실 무기명 설문조사를 찬성하는 제약사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내부 공개를 천명했다면 뭐라도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이런저런 이유로 시기를 늦추는 것은 제약산업을 우습게 보이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국내 제약사 관계자는 "요즘 리베이트 조사가 계속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업계가 어느 정도 정화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이런 시점에서 제약협회가 살짝 발 빼는 것은 그동안의 메시지를 희석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