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이지원 기자] 국산 항암신약 '렉라자'의 뒤를 이을 글로벌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이 임상시험 수행을 넘어 신약개발의 과학적 방향과 전략을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제언이 나왔다.
렉라자 개발에 참여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종양내과 조병철 교수는 13일 열린 '2026 KoNECT(코넥트) 임상시험 국제 콘퍼런스'에서 이같이 밝혔다.
특히 국내 병원이 보유한 환자 검체와 임상 데이터를 신약개발에 적극 활용하고, 바이오마커 연구와 적응형 임상시험 설계를 통해 개발 과정에서 과학적 의사결정을 주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우연으로 시작된 항암신약의 성공…"넥스트 렉라자 위한 생태계 마련해야"
이날 조 교수는 렉라자의 개발 과정을 소개하며 "우연한 만남이 신약개발의 중요한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조 교수에 따르면 렉라자 개발은 2013년 제노스코 고종성 박사와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당시 후보물질 GNS-1480을 소개받았지만 연구비 부족으로 공동연구가 성사되지 못했다.
하지만 2년 뒤 예상치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조 교수는 "2015년 3세대 EGFR-TKI 내성 연구를 위한 연구비 지원을 신청했지만 선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유한양행 소속이었다"며 "이후 유한양행의 초청으로 회사를 방문했는데, 2년 전 고종성 박사가 소개했던 GNS-1480이 YH25448이라는 이름으로 개발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공동연구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개발 과정 역시 순탄치 않았다. 경쟁 약물인 오시머티닙(제품명 타그리소)의 빠른 개발과 국내 급여 적용으로 임상시험 환자 모집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유한양행은 2018년 얀센과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하며 글로벌 개발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렉라자는 국내 1차 치료제로 승인받았으며, 아미반타맙(제품명 리브리반트)과의 병용요법은 2024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조 교수는 "렉라자의 성공은 바이오텍의 후보물질 발굴, 학계와 병원의 과학적·임상적 근거 구축, 제약기업의 지속적인 개발과 글로벌 진출 역량이 결합한 결과"라면서도 "다음 성공은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게 되는 상황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개발까지 사람들을 연결하고 협업을 지원하는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임상시험 수행 넘어 개발 전략 주도로…대형병원 역할 확대 필요
이에 조 교수는 임상시험 수행뿐 아니라 개발 초기부터 과학적 가설과 임상 전략을 수립하는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임상적 가설 설정과 환자군 선정, 용량 최적화, 병용요법 및 임상시험 설계 등 개발 전략 수립 ▲바이오마커와 환자 검체 연구를 통한 중개과학의 초기 통합 ▲초기 개념입증(PoC)부터 글로벌 개발까지 다학제 연구팀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개발 역량 구축 등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 교수는 국내 대형병원이 개발 역량을 강화할 핵심 주체라고 언급했다. 그는 "주요 대형병원에는 환자와 임상 전문성, 데이터라는 세 가지 중요한 자원이 함께 존재한다"며 "이러한 자원은 초기 개념입증을 가속화하고, 신뢰할 수 있는 근거를 생산하며, 새로운 치료 표적 발굴과 적절한 환자 선정에 기여할 수 있다"고 했다.
국내 대형병원이 갖춰야 할 기반으로는 ▲물리적 인프라(중개연구 조직 및 바이오뱅크) ▲인적 인프라(연구시간이 보장된 의사과학자 및 전담 연구팀 등) ▲디지털 인프라(AI 기반 임상기록, 유전체 정보, 치료 결과 통합 멀티모달 플랫폼)를 제시했다.
조 교수는 "한국의 병원은 단순히 새로운 의약품을 시험하는 장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차세대 렉라자 개발이 시작되는 장소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환자에서 답 찾고, 임상에서 가능성 검증해 신약개발 전략 고도화해야"
조 교수는 대형병원이 보유한 환자 검체와 임상 데이터를 실제 신약개발에 활용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그는 특히 환자의 치료 반응과 내성 발생 원인을 후속 신약개발에 반영하는 역중개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실제로 조 교수 연구팀은 폐암 환자의 종양과 혈액 검체를 활용해 치료 반응과 내성 기전을 분석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오가노이드와 환자 유래 이종이식 모델, 단일세포 RNA 시퀀싱, 공간 프로파일링 등을 통해 어떤 환자가 치료에 반응하고, 치료 효과가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인지 규명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조 교수는 "산업계 파트너들과 함께 약물의 작용기전을 이해하고, 임상시험에 활용할 바이오마커를 발굴하며, 내성을 극복할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려고 한다"며 "핵심은 임상에서 제기된 질문을 실험실로 가져와 연구하고, 다시 그 결과를 환자 치료와 신약개발에 적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유럽의 PIONeeR 연구를 소개하며, 새로운 근거에 따라 임상시험의 방향을 조정하는 적응형 임상시험 설계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PIONeeR 연구는 면역항암제 치료 이후 질병이 진행한 폐암 환자를 대상으로 여러 병용요법을 평가하는 임상시험이다. 사전에 설정한 의사결정 기준에 따라 효과가 부족한 치료군은 조기에 중단하고, 유망한 치료법은 후속 평가를 진행하도록 설계됐으며, 연구 과정에서 새로운 근거가 확보되면 병용요법을 추가하는 것도 가능하다.
조 교수는 "한국이 배워야 할 것은 단순히 임상시험을 더 빨리 수행하는 방법이 아니다"라며 "어떤 개발을 중단해야 하는지, 어떤 치료법을 계속 추진해야 하는지, 그리고 다음에 무엇을 검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임상시험을 설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