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해외 학술대회 참가를 위해 비행기에 탑승했던 대한가정의학회 소속 의사들이 위급한 기내 환자를 응급처치해 살려낸 사건이 화제가 되고 있다.
다만 의사들은 보다 많은 의료진들이 응급진료가 필요한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진료에 임할 수 있도록 '착한사마리아인법(응급의료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1일 의료계 등에 따르면, 지난 3월 24일 대한가정의학회 김철민 이사장을 비롯해 강남을지대병원 김정환 교수, 국립암센터 명승권 교수 등 가정의학회 의사 7명은 세계가정의학회 아시아태평양지역 학술대회 참석을 위해 인천발 마닐라행 비행기에 탑승한 뒤 응급환자를 마주했다.
"비행기 안에 의사 선생님이 계시면 도움이 필요하니 나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비행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응급 환자를 알리는 비행기 '닥터콜'이 울렸다. 지체 없이 가정의학과 의사들은 환자에게 달려갔지만 화장실 앞에서 쓰러진 외국 여성은 이미 혀가 뒤로 말려들어가기 시작하면서 호흡이 약해져 있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강남을지대병원 김정환 교수에 따르면, 우측 뇌경색이 의심됐다. 이에 의료진은 삽관 없이 바로 기내 후두마스크를 삽입해 기도를 확보하고 앰부백을 짜서 인공호흡을 시작했다.
김정환 교수는 1일 메디게이트뉴스와 통화에서 "병원이었다면 검사를 통해 제대로 환자 상태를 파악하고 여러 의학 장비들을 이용할 수 있는 환경에서 진료를 하게 되지만 비행기에선 어떤 정보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환자를 마주해야 했다. 수축기 혈압이 80이하로 떨어지면서 곧 심장지까지 올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환자는 기적처럼 혈압이 오르고 자발적인 호흡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환자 의식도 돌아왔다. 가정의학과 의사들은 마닐라 현지에서 환자를 인계하고 위기 상황에서 환자를 살렸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다만 이 사건이 의료계 내부에 알려지자,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칭찬과 격려가 대부분이었지만 혹시 모를 의료소송을 우려하는 목소리 역시 나온 것이다.
실제로 설문조사에 따르면, 많은 국내 의사들이 기내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대병원 국제진료센터 임주원 교수가 대한가정의학회와 한국항공우주의학협회 회원 445명을 대상으로 기내 닥터콜 관련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기내 응급상황을 실제 경험한 96명 중 76%인 73명이 응급진료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앞으로 비슷한 응급상황이 발생하면 참여할 것이라고 응답한 인원은 62%에 불과했다. 이는 미국에서 비슷한 조사에서 80%가 "응급상황에 나서겠다"고 응답한 것에 비해 적은 수치다. 연구를 진행한 임주원 교수는 "의사들이 응급진료 참여를 주저하는 이유는 소송 우려 때문이다. 국내 법률을 잘 알고 있는 의사들의 참여 의향은 36%로 더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이번 마닐라행 비행기에서 환자를 살린 김정환 교수도 더 많은 의사들이 적극적으로 응급진료에 나서기 위해선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봤다.
김 교수는 "가정의학과 의사들이 7명 가량 같이 있었기 때문에 선뜻 용기를 낼 수 있었지만 비행기에 의사가 혼자였다면 법적 책임을 혼자 져야 한다는 생각에 자신있게 진료에 임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현행 '응급 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의2(선의의 응급의료에 대한 면책)'는 생명이 위급한 환자에게 응급처치를 제공하다 발생한 손해에 대해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민·형사 책임을 묻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사망 등 환자에게 악결과가 발생했을 때, 형사책임이 면제되지 않아 사법리스크 우려가 크다.
이에 2023년 급하게 응급의료가 필요한 상황에서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 없이 응급처치 등을 하는 경우, 환자가 사망하더라도 형사책임을 면제하도록 한 일명 '착한사마리아인법'이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까지 통과했지만 '기존 형벌체계의 예외가 생길 수 있다'는 이유로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폐기됐다.
김정환 교수는 "비행기 내에선 제대로 된 의료장비도, 환자 정보도 없다. 어떤 약물이 있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진료가 시작된다"며 "그런데 현재 응급의료법은 모호한 부분이 많다. 법률 해석에 따라 환자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선의로 응급환자를 치료한 의사가 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그는 "응급환자의 목숨을 살리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이 환자는 사실 위태롭지 않았고 의사가 너무 과잉 또는 문제가 되는 진료를 해서 환자에게 악결과가 나왔다'고 주장하면 의사 입장에선 매우 난감하다. 병원은 모니터링 기계도 있고 진료기록을 해줄 인원도 함께 있기 때문에 무죄 입증이 원활할 수 있지만 비행기는 그렇지 않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응급진료 과정에서 문제가 됐을 때 의사를 보호할 수 있는 체계가 제대로 갖춰져있지 않다 보니 닥터콜이 왔을 때 혹시 모를 소송을 감당하느니 차라리 응급진료를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 수 밖에 없다"며 "자신의 진료과목이 아니라면 더욱 선의의 응급진료를 하기 어려워진다. 의사가 이런 비슷한 응급 상황에서 '처벌 받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어야 자신 있게 진료에 나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