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최지민 인턴기자 고려의대 본2] 서강대 화학과·과학커뮤니케이션 이덕환 명예교수가 “의대생 2000명 증원을 하려면 하나당 7조인 상급종합병원 20개를 지어야 한다. 이 사실을 국민에 설명했다면 ‘세금이나 병원비를 엄청나게 내야 하는구나’ 하고 금방 알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 KMA POLICY 특별위원회는 5일 대구에서 ‘2024년 대한민국 의료농단에 대하여’를 주제로 워크숍을 개최했다. 이덕환 교수는 워크숍에서 이 같은 의견을 밝혔다.
이 교수는 “의정 갈등이 시작될 때 의협·대전협·의대협이 각각 3개, 7개, 8개의 요구안을 내놨지만, 국민 대부분은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요구들을 국민이 분석하고 이해하길 바라는 건 무리다. 이렇게 되면 소통은 끝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2000명 증원은 해석이 필요 없는 총선용 카드였다. 그런데 정부에 과학적 근거를 내놓으라 요구하는 것은 황당한 일”이라며 “우리나라의 의사 수가 몇 명인 게 적정한가를 알려주는 과학 분야는 어디에도 없다. 과학적 추계는 불가능하며, 낙수 효과가 잘못된 용어이듯이 과학적 추계도 용어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의사들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20년간 정원을 묶어놨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며 “1980년대 의대 정원은 3140명까지 늘어났고, 이후 줄다리기를 거쳐 2006년 3058명으로 조정됐다. 국민은 이 역사를 모른 채 언론과 정부가 만든 ‘20년간 정원 동결’ 프레임만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관찰해 본 바로는 의료계가 증원을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해부학 실습실이었다. 그런데 해부학 실습실 때문에 증원을 못한다고 설명하는 것은 5000만 국민을 설득하기엔 너무 설득력이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덕환 교수는 “2000명 증원은 수련을 못 시키기 때문에 문제”라며 “매년 수련을 받는 인원은 약 3200명이고, 그중 약 2000명이 상급종합병원에서 수련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대병원이 수용하는 인턴은 100명 정도다. 2000명을 더 늘리려면 서울대병원 수준의 병원을 20개 더 만들어야 하는 것”며 현실적인 수련 인프라 부족을 강조했다.
그는 또한 윤석열 전 대통령이 언급한 부산대병원 신축 비용이 7000억원이라는 점을 들어 “20곳을 지으려면 비용뿐 아니라 이를 감당할 의사와 환자 수요도 없다”며 “그 얘기를 해줬다면 국민이 ‘세금이나 병원비를 무자비하게 내야 하는 것이구나'라고 금방 알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의료기관의 정체성 변화에도 주목했다. 그는 “1989년 상급종합병원 제도가 생기면서 ‘서울대학교부속병원’이라는 명칭 대신 ‘서울대학교병원’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자 교육 목적의 병원이 존재감을 잃었고, 전공의들은 값싼 노동자로 전락했다. 환자들은 상급종합병원에 와서 전공의를 보고 혼란스러워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또한 “의사는 치과의사·한의사·간호사·의료기사 등 다양한 직역군과 적대적인 분위기가 있는 것으로 안다”라며 “의사 안에서는 교수·봉직의·개원의·수련의 등 다양한 계급이 있고, 각 직역 간 의견 합치가 어렵다”며 ”이렇게 분열된 구조에서는 ‘소통’이라는 말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수련 교육원 설립 논의에 대해선 “이제 와서야 나오는 것이 의아하다”며, “커리큘럼과 평가방법이 없는 도제식 교육을 MZ세대에게 강요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의료 정보 전달에 대해서는 “대다수 국민은 인터넷과 언론에서 의료 정보를 얻는다. 그러나 의료법상 의사는 광고를 하지 못해 정보 제공에 한계가 있다. 이 틈을 타 쇼닥터들이 부정확한 정보를 퍼뜨린다”며, “의사협회 중앙윤리위원회가 이 문제를 단속하고 징계 결과를 공개해 노력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남은 숙제가 굉장히 많다” 라며, “환자와의 신뢰, 의대생과 전공의와의 신뢰, 직역 간 갈등 해소, 과학계와의 관계 회복 등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의사의 악마화에 따른 후유증이 우려된다. 20년 전 교사가 악마화된 일의 효과가 이제야 나타나서 현재 교직의 인기는 급격히 하락했다. 지금의 젊은 세대가 의사를 ‘악마’로 기억하게 된다면, 그 후폭풍은 앞으로 매우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런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문가로서의 도덕적 품격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의사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핵심은 전문성이다. 의대생과 전공의 교육을 질 높은 교육으로 최대한 강화해야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수 있다”라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