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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이 가스라이팅에 더 취약?…가해자는 나르시시즘‧소시오패시 성향 보여

    서울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권준수 교수 "피해자는 의존적 성향, 우울증‧PTSD 경험…아동학대 준하는 강력처벌 필요"

    기사입력시간 2021-06-04 06:20
    최종업데이트 2021-06-04 15:42

    현대 사회의 관계 속에 숨겨져 있던 많은 가스라이팅 사례들이 최근 속속 드러나고 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얼마 전 때아닌 연예계 가스라이팅(Gaslighting) 논란으로 신문 사회면이 시끄러웠다.
     
    서른한 살 동갑내기로 알려진 서예지‧김정현 배우의 얘기다. 서 씨는 김 씨에게 '대본에서 스킨십을 빼라', '여성 스태프에게 인사하지 말라'는 등 무리한 요구사항을 했고 이로 인해 김 씨는 불성실한 태도로 출연하고 있던 드라마에서 중도 하차했다.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서 씨와 계약한 광고 업체들끼지 가세해 줄지어 계약을 해지하는 등 파장이 파장을 낳았다.
     
    이번 사건이 신문 연예면뿐만 아니라 사회면까지 장식하며 대중의 관심을 받은 이유는 상대방의 심리를 교묘하게 조작해 판단력을 잃게 만드는 '가스라이팅'이 이슈의 중점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데다 가스라이팅이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주장들이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연일 가스라이팅 관련 정보가 언론과 인터넷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도배하기 시작했고 보기보다 현대 사회의 관계 속에 숨겨져 있던 많은 가스라이팅 사례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직적 권력관계서 다수 발생…남녀 연인 사이에서도?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가스라이팅 범죄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무슨 심리적 기전이 작용하는 것일까. 가스라이팅은 보통 나이 혹은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수직적 권력관계 사이에서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병원 권준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전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는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가스라이팅은 대개 친밀한 관계에서 많이 나타난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위해서 한다는 식이라 피해자가 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이어 "가정, 학교, 군대, 가족 등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조직에서 가스라이팅이 잘 나타나고 수직적인 권력관계에서 누군가를 통제하고 억압하려고 할 때도 잘 발현된다"고 설명했다.
     
    서울대병원 권준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가스라이팅 사례를 치료하기 위한 심리 상담이나 제도적 처벌 등도 필요하다고 봤다.

    남녀 연인관계에선 어떨까. 보통 남성이 여성을 대상으로 시도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실제로 가스라이팅 단어의 유래도 1938년 패트릭 해밀턴의 연극 '가스등'에서 여성이 아닌 남성 즉, 남편이 아내의 재산을 노리고 결혼한 후 온갖 속임수와 거짓말로 멀쩡한 아내를 정신병자로 몰고 가는 내용에서 나왔다. 2018년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 데이트 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봐도 남‧여 연인 사이에서 신체·언어·정서적 폭력을 경험한 이들은 여성이 55.4%, 남성이 54.5%로 거의 같았다.
     
    피해자, 사회적 고립으로 우울증‧PTSD 경험…가해자는 소시오패시 성향
     
    권준수 교수는 특히 가스라이팅 피해자의 심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피해자는 지속적으로 관계에서 오는 모든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면서 점차 위축되고 결국 자존감이 바닥을 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이 때문에 스스로 관계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타인이 봤을 때 지극히 비상식적인 관계를 오래 지속하게 되는 것이다.
     
    권 교수는 "피해자가 가스라이팅에 빠지게 되면 우선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자존감이 급격히 하락한다"며 "이 과정에서 가해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조하게 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심리적 불안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고 멀쩡한 자신을 의심하고 모든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가해자는 피해자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피해자는 우울증과 불안증, 심한 경우 오랜 시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경험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반면 가해자는 지나친 통제나 억압, 비난 등 기전을 통해 피해자를 위축시키게 만드는 특징을 가진다. 가해자는 이 과정에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는 경우가 많고 자기애적 성향(나르시시즘) 혹은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일종인 소시오패시(sociopathy)를 앓고 있는 경우가 많다.
     
    위계질서 팽배한 한국 취약…아동학대 준하는 강력처벌 필요
     
    가스라이팅은 의학적으로 정식 질병명칭은 아니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 관련된 약물치료나 정형화된 상담치료 프로세스가 마련되진 않은 상황이다. 학회 차원에서도 아직까지 가스라이팅이 수면 위로 올라온 관심 주제는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권 교수는 위계적 조직문화가 팽배한 우리나라 상황에서 좀 더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봤다. 특히 그는 이를 치료하기 위한 심리 상담이나 제도적 처벌 등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권준수 교수는 "아무래도 수직적인 문화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에 의해 약자가 휘둘릴 수 있는 경향이 많다. 이 때문에 수평적 문화보다 수직적 문화가 강한 우리나라에서 가스라이팅에 취약할 수 있다"며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만약 가스라이팅이라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상대방과 거리두기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스스로 자존감을 회복하고 자신의 삶에 대한 뚜렷한 철학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판단력도 중요한 치료 요소"라고 설명했다.
     
    제도적 보완과 관련해 그는 "가스라이팅도 일종의 정신적 학대(emotional abuse)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동학대를 강력히 처벌하는 것처럼 가스라이팅 범죄에 있어서도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