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서 29일 저녁 대규모 압사사고가 발생하면서 의료계도 밤새 홍역을 앓았다. 30일 오후 4시 30분 기준 153명이 숨지고 103명이 다쳐 모두 25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망자들 대부분은 압력에 의한 질식사였고 골절 등 여러 부위의 외상 소견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생존자 및 유가족들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앓게 된다는 점에서 관리가 시급하다고 호소하고 있다.
반면 인근 병원들은 압사사고 현장의 심정지 및 중증환자에 더불어 경증 환자들까지 몰리면서 아수라장이 된 상태다. 이에 의료진들 사이에서 살릴 수 있는 중증환자에 우선순위를 맞춰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구조 시작되면서 근처 대형병원부터 서울전역 병원 모두 마비
30일 소방 당국에 따르면 이태원 압사 참사 사망자는 153명으로 이들은 구조가 시작된 29일 오후 10~11시 사이부터 중증 및 심정지 환자부터 근처 대형병원으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환자 수가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특히 사고 지역 근처인 순천향대서울병원을 포함해 국립중앙의료원, 이대목동병원, 강북삼성병원, 중앙대병원, 서울대병원, 여의도성모병원 등 대부분의 서울 시내 병원들이 사실상 마비 사태를 겪었다.
실제로 환자 이송을 위한 각 대학병원 환자관리 현황판이 '이태원 재난 사고로 인해 CPR 이외 모든 환자 수용이 불가하다'는 병원들의 메시지로 도배됐다는 후문이다.
차의과대학 박수현 응급의학과 교수는 "심정지 환자가 3~4명만 들어와도 대형병원 응급실은 포화상태가 된다. 우리 병원도 거의 대부분의 의료진이 밀려드는 환자를 감당하기 위해 투입됐다"며 "이번 사건 사망자가 150명 가량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어제 서울 수도권 대형병원은 대부분 마비였다"고 말했다.
특히 이태원에서 가까운 대형병원의 경우 경증환자들이 스스로 내원하는 사례가 늘면서 환자 병원 내 환자 포화 상태가 더욱 극심해졌다.
순천향대병원 교수 A씨는 "중증·심정지 환자 응급처치에 모든 의료 역량이 동원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경증환자들이 스스로 병원을 찾는 사례가 많았다"며 "일부 환자들이 진료가 늦다거나 신원확인 등 행정절차가 제때 이뤄지지 않는다며 화를 내는 사례도 있었다"고 전했다.
'모든 심정지 환자 살리려다 중환자 치료 시기 놓쳤다' 지적도
이런 상황에서 응급실 의료진은 모든 심정지 환자를 살리려다 보니 오히려 빠른 응급 대처가 필요했던 중증환자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다는 지적을 제기했다.
응급의학적 소견으로 블랙(소생 가능성이 없거나 희박)에 해당하는 환자를 과감히 포기하고 레드(매우 위중한 상황) 환자를 적절히 이송하고 치료하는 치료적 우선순위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박수현 교수는 "심정지 환자를 2~3명씩만 각 병원에 옮겨도 대부분의 의료인력이 이들을 살리기 위해 투입된다. 소위 블랙 환자를 살리기 위해 레드인 환자들의 치료가 늦어졌고 이들이 심정지가 올 때야 의료 자원을 받게 됐다는 지적이 일부 의료진들 사이에 있다"고 말했다.
다만 박 교수는 "이번 압사 사고 환자 대부분이 20대와 30대, 일부 10대도 포함된 만큼 현장에선 이론대로 무조건 이들을 포기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젊은 환자의 경우 간혹 소생하는 사례도 있기 때문에 치료적 우선순위 논란은 매우 복잡한 문제"라고 설명했다.
대한응급의학과의사회 이형민 회장은 "현장에서 환자의 중증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없이 이송이 이뤄지거나 모든 환자들을 대상으로 심폐소생술 등 응급처치가 이뤄졌다"며 "압사 등 재난 상황에서 0순위는 심정지 환자가 아니다. 이들보다 중요한 환자는 중증 환자다. 이들이 빨리 구조되고 이송 후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행정상 대처가 아쉽다"고 말했다.
부족한 현장 대처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이 회장은 "일반인들이 대로변에서 그대로 CPR을 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이는 제대로 된 재난 대응이 아니다"라며 "압사 사고로 심정지가 발생할 경우 이미 골든타임이 지난 사례가 많기 때문에 무조건 CPR을 하기 보단 주변을 정리하고 길을 터서 구급차가 원활히 이동하고 환자를 이송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더 현명한 판단"이라고 말했다.
압사 사망 대부분 '질식사'…압좌증후군·두개골 골절 사례도
현장 응급의학과 의사들은 이번 압사 사고로 사망한 환자 대부분이 질식사였다고 전했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보니 서로 밀치고 밀리는 상황에서 압력이 가해지고 이로 인해 가슴이 눌리고 숨을 쉬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장시간 압력으로 인한 골절 등 외상 사례도 빈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형민 회장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무게가 가해지거나 압력이 세지면 폐가 정상적인 호흡을 하기 어려워진다. 이로 인해 저산소증이 오고 의식을 잃게 된다"며 "압사 사고는 오랜 기간 눌려있을 때 발생하기 때문에 구조 골든타임이라는 것이 딱히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순천향대병원 김호중 응급의학과 교수는 "이번 사망 사례를 보면 복부 외상 등 환자 보단 대부분이 호흡이 잘 되지 않아 사망한 질식사가 대부분"이라며 "여러 부위의 외상 환자들도 많은데 심지어 두개골 골절 환자도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압력이 늘어나면서 혈액순환 장애 즉, 압좌증후군 환자도 늘고 있다. 압사를 당하게 되면 압력으로 인해 혈액순환에 장애가 생기게 되는데 이때 이로 인해 죽은 세포에게서 칼슘, 미오글로빈 단백질 등 독소가 생성된다.
박수현 교수는 "가슴 흉각 쪽으로 압력이 높아지면 몸에서 가장 큰 정맥을 통해 혈액이 순환돼야 하는데 오히려 피가 역류하는 현상이 발생한다"며 "압력이 장기간 지속되면 목과 머리 쪽으로 피가 몰리면서 얼굴이 부으면서 청색증, 자반증 등 증상이 생기고 눈에 결막 출혈이 생기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런 상태에서 단 몇분만 지나면 환자가 바로 사망할 수 있다"며 "이외에도 근육파열, 골절 등 환자도 많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생존자 트라우마 관리 급선무…"범인찾기 보단 예방 대책 논의하자"
생존자 및 유가족들에 대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관리가 시급하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다.
또한 책임을 일부에게 전가하려는 태도보단 향후 예방을 위한 대책을 세우는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보건복지부도 트라우마 치료 등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 30일 오후 3시부터 비상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찬승 사회공헌특임이사(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 홍보위원장)는 "어떤 재난이 일어나면 원인을 찾고 한 집단 혹은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현상이 나타난다"며 "그러나 이런 사고는 복합적인 원인이 중첩되면서 발생한다. 특정 사람을 지목하거나 일부에게 책임을 전가하려는 시도는 옳지 못하다"고 말했다.
정 이사는 "여러 연구에서도 재난 상황에서 비난을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 꼽는다. 그러나 비난은 생존자와 유가족에게 더욱 극심한 정서적 불안과 트라우마를 불러올 수 있다"며 "비난 보단 비슷한 재난을 예방할 수 있는 대책을 지금부터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구체적인 대책으론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 질서를 위한 행정적 지원과 사후 정신건강의학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여러 해외 연구에 따르면 재난 상황을 겪은 환자들의 트라우마는 굉장히 강렬하고 오래 지속된다.
정 이사는 "여러 사람들이 모이는 집회나 축제 등에 대한 안전장치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 사전에 인구가 얼마나 과밀하기 모일지 예측하고 현장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며 "남은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정신과적 진료 지원도 적절히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여러 연구에 따르면 신체적 부상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도 압사 사고에서의 트라우마를 오래 앓게 된다. 죄책감이나 대인기피, 불안 등 트라우마로부터 이들을 지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압사사고는 전 세계적으로 꾸준히 발생하고 있는 재난적 인명피해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종교 행사나 스포츠 경기·축제 등에서 자주 발생한다. 공식통계 기준으로 희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압사 사고는 1990년 7월 사우디아라비아 성지순례 사고로 메카로 향하는 보행용 터널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1426명이 압사했다. 우리나라는 1960년 1월 서울역 계단에서 탑승객들이 넘어지면서 31명이 압사하는 사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