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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되는 형사처벌...외과의사는 프로메테우스인가

    [칼럼] 박제훈 대한외과의사회 정책부회장

    기사입력시간 2023-09-25 02:29
    최종업데이트 2023-09-25 02:29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최근 국내에서 개봉한 화제의 영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를 관람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는 불길속을 보여 주며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가 자막으로 떠오른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불을 훔쳤다. 그리고 그것을 인간에게 주었다. 그 죄로 그는 바위에 쇠사슬로 묶인 채 영원히 고문을 받아야 했다.

    이 영화는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오펜하이머의 핵무기 개발 과정과 그 이후의 청문회 과정을 그린 영화다.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당시 시대 상황이 핵무기 개발이라는 필연의 과제가 되었고, 미국은 기어코 독일보다 먼저 개발에 성공하고, 일본에 두 번의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결국 전쟁을 승리로 매듭짓는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전쟁을 이긴 영웅에서 전쟁 이후 메카시즘을 포함한 여러 정치상황으로 인해 정치의 희생양(?)이 돼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영화의 원저 또한 제목이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다. 정말로 잘 지은 제목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필자는 3시간이라는 긴 상영 시간 내내 오펜하이머에게 집중하기 힘들었다. 머리 한 켠에서 계속 대한민국 '외과의사'가 바로 현재의 '코리안 프로메테우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를 대한민국 외과의사로 배역을 바꿔도 영화 스토리가 어색하지가 않다.

    최근 이 나라 사법부는 '외과의사'를 단죄(?)하는 판결들을 잇따라 내리고 있다. 사법부는 마치 화난 제우스마냥 이 땅의 외과의사(프로메테우스)에게 독수리(법전)를 보내 고통을 주고 있다. 또 다른 법집행자는 '외과의사'를 계속해서 재판정으로 보내고 있다. 의료윤리의 4대 원칙 중 'Primum non nocera'라는 말이 있다. 남에게 절대로 해악을 끼치지 말라는 '악행금지의 원칙'이다.

    외과의사는 수술이나 시술같이 환자의 몸에 칼을 대는 침습적인 진료행위로 인해 그 자체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악행금지의 원칙'과의 한계선상에서 불가피한 선택을 해야 하고, 어느 순간 이를 거스를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또 다른 윤리원칙인 '선행의 원칙', '정의의 원칙'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외과의사는 수술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이며, 동시에 수술을 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채,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선의나 악의를 떠나 현실에서 모든 결과가 100% 좋은 결과만을 만들지는 못한다. 그래서 전체주의 국가 중 일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에서  '중대하고 고의적인 과실'인 경우를 제외하고 단지 결과가 좋지 않았다고 해서 외과의사들에게 형사처벌을 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나라 법집행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필자는 외과의사로서 설명의 의무, 최선의 의무, 주의성실의 의무 등 환자의 안전과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최선의 진료와 최선의 수술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필자는 한편으로 법률 전문가는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일련의 기소 사건과 그에 따른 판결들을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어떤 근거와 법리에 의해서 그렇게 결정됐는지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법의 집행자들은 과연 의학, 특히 수술을 포함한 필수의료의 본질을, 나아가 외과의사의 철학이나 세계관을 이해하고나 있을까, 아니 이해하려는 의지는 있는 것일까하는 궁금증만 커져 간다. 정말로 의학의 세계가 단지 법리만으로 따질 수 있고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가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신화에서 독수리는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계속해서 쪼아먹지만 간은 이내 재생된다. 독수리는 이를 또 쪼고, 프로메테우스는 고통과 회복을 영원히 반복하게 되는 고문을 당하게 된다. 이는 외과의사도 마찬가지다. 이미 환자의 결과가 안 좋더라도 심지어는 사망하는 결과를 맞닥뜨려도, 외과의사는 또 다른 환자를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으로 무장하고 수술을 하기 위해 칼을 잡는다.

    동시에 다수의 응급수술 환자를 진료해야 하는 경우에는 어떤 사연으로 인해 슬퍼할 겨를조차 없다. 필수의료 분야는 더더욱 그런 경우가 많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오펜하이머가 청문회에서 시달리며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을 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조언한다. '나라가 자네를 버리면 나라를 떠나라고'.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피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며,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리고 약 60년이 지나서야 당시의 누명을 벗게 된다. 현재 이 나라의 사법부는 외과의사들에게 이 나라를 떠나라는 의미로 이런 형사처벌을 감당하면서 의사 업무를 수행할지 여부를 결정하라는 판결들을 내리는지 묻고 싶다.

    물론 필자는 이런 판결때문에 외과의사들이 이 나라를 떠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나라 외과의사들의 철학과 환자에 대한 진정성, 그리고 그 처절한 노력의 숭고함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메테우스를 그린 많은 그림에서 독수리는 매우 강하고 정복자와 같은 모습으로 표현되고, 프로메테우스는 독수리에게 눕힌 채 밟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구스타프 모로가 그린 프로메테우스는 매우 다른 느낌을 우리에게 준다. 우선 독수리가 쪼는 부위가 해부학적으로 간이 있는 부위가 아니다. 충수(맹장)가 있는 전혀 다른 위치다. 또한 독수리도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가 등장하며 이 중 한 마리는 프로메테우스 왼발 앞에서 죽어 있다.

    나머지 한 머리도 간을 쪼고 있지 않으며 마치 프로메테우스의 눈치를 보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독수리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용맹하고 날쌘 독수리가 아니라 동물의 사체 주변에서 죽은 고기를 주로 먹는 대머리 독수리다. 즉 강한 독수리가 아니다. 무엇보다 다른 느낌을 주는 것은 프로메테우스의 표정과 시선이다. 자기 간을 쪼는 독수리조차 자기 발 앞에서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프로메테우스의 시선은 저 멀리 앞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며, 표정은 마치 승리자처럼 강하다. 필자는 이런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이야말로 현재 이 나라 외과의사가 갖고 있는 모습이며, '선지자'로서 현재를 버텨내며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언제까지 제우스 마냥 대한민국의 '외과의사'에게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을 줄 것인가. 그리고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경우를 살펴보고, 교훈을 얻기 바란다. 현실에서 '코리안 프로메테우스'를 만들어서는 더더욱 안될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단지 신화 속에서만 존재해야 한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