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임솔 기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COVID-19) 상황에서 정부의 때 아닌 원격의료 법 개정 가능성 언급에 의료계의 거센 반발이 예고됐다. 코로나19 위기에 함께 발 벗고 나섰더니 '토사구팽(兎死狗烹)'과 다름 없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4일 “비대면 의료서비스 등 코로나19를 전화위복 계기로 비대면 산업을 적극적으로 키우겠다”고 밝힌 이후 각 부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원격의료 서비스를 육성하겠다는 발표를 들고 나왔다. 급기야 보건복지부도 법 개정을 통한 원격의료 허용 가능성까지 내비쳤다.
현행 의료법 제34조(원격의료)에 따르면 의료인은 컴퓨터·화상통신 등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해 먼 곳에 있는 의료인에게 의료지식이나 기술을 지원하는 원격의료를 할 수 있다. 원격의료를 행하거나 받으려는 자는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는 시설과 장비를 정해야 한다. 하지만 의료인과 의료인 간의 원격협진 의미의 원격의료가 아닌 의료인과 환자간 원격의료는 아직 법이 개정되지 않은 상태다.
국내에서는 2002년 3월 의사 의료인 간 원격의료제도가 도입됐고 2006년 7월에는 의사와 환자 간 원격진료 시범사업이 시작됐다. 2010년 4월 18대 국회를 시작으로 의사의 원격 진료와 처방을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의료법 개정안이 계속 제출됐지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조차 상정되지 못했다. 원격의료가 의료민영화와 대형병원 배불리기라는 이유로 당시 야당(현 더불어민주당)과 의료계 반대가 거셌기 때문이다. 다만 올해 코로나19가 확산되자 2월 24일부터 한시적으로 전화 상담과 처방이 허용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 14일 비대면 산업 육성 발언한 이후 각 부처 일사천리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4일 코로나19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 수 있다면서 비대면 산업을 적극적으로 키우겠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급부상하고 상품과 서비스의 비대면 거래, 비대면 의료서비스, 재택근무, 원격교육, 배달 유통 등 디지털 기반의 비대면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해야 한다”라며 “정부는 비대면 산업을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 4차산업혁명 기술과 결합한 기회의 산업으로 적극적으로 키워 나가겠다”고 말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문 대통령의 의지를 반영한듯, 29일 제1차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회의에서 “원격의료·교육·비즈니스 등 비대면 산업에 대해서는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측면에서 추가 규제 혁파에 속도를 내겠다”고 밝혔다. 비상경제 회의는 한국판 뉴딜 정책으로 코로나19로 위기에 빠진 경제산업을 살리기 위해 마련됐다.
이날 의료신기술 등 10대 산업 분야의 65개 규제 혁파 추진 과제도 상정됐다. 세부적으로는 의료신기술 개발을 위한 연구 환경 조성을 위해 혁신 의료기기 우선심사제도를 비롯해 의료데이터 활용 확대, VR·AR 의료기기 품목 신설, 건강관리 서비스 인증제 등이 나왔다.
홍 부총리는 “혁신 의료기기 우선심사제도 도입, 소비자 직접의뢰 유전자 검사 확대, 등 추진 과제를 선정했다. 이를 통해 신산업 육성을 위한 연구 환경을 조성하고 혁신 의료기기를 육성하는 등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은 29일 ‘코로나19가 바꿀 미래: 어떤 기술을 준비해야 하는가’ 주제의 온라인 포럼에서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의 유망기술을 선정했는데, 원격의료가 가장 우선순위로 꼽혔다.
복지부, 일주일만에 법 개정 가능성으로 선회...의료계 반발 예고
문 대통령에 각 부처들이 나서자, 당초 의료법 개정을 검토할 여력이 없다던 보건복지부도 일주일만에 달라진 태도를 보였다. 지난 22일에는 코로나19 상황에서 한시적으로 허용된 전화 상담과 처방 외에 원격의료법 개정을 검토하지 않겠다더니, 비상경제회의가 열린 29일에는 법 개정 가능성까지 내비친 것이다.
윤태호 중앙사고수습본부 방역총괄반장(보건복지부 공공정책관)은 22일 정례브리핑에서“원격의료 도입에 대한 정부 입장을 밝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라며 "다만 현재와 같이 코로나19 상황에서는 의료기관에서 집단감염을 막고 의료기관의 보호를 위해 비대면 진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손영래 중앙사고수습본부 전략기획반장(복지부 대변인)은 “원격의료는 현행 의료법상 가능하지는 않다. 따라서 현행법의 테두리 내에서 비대면 진료를 활성화해서 코로나19의 위험에서 취약한 고위험 집단을 보호하는 쪽으로 하고 있다"라며 “그 외 법령 개정이 필요한 부분은 현재 긴급한 상황을 고려하면 검토할 여력이 없다. 현재는 현행 제도의 틀 내에서 비대면 진료를 계속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강립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1총괄조정관(복지부 차관)은 29일 정례브리핑에서 “현재 의료의 근간이 되고 있는 대면진료의 효용성을 높이거나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지, 미래 의료환경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해 국민건강증진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식인지를 기준으로 논의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김 조정관은 "새로운 미래의 의료기술, 또 발전적인 기술을 언제나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런 도입에 애써 왔던 우리 의료진들과 의료기관의 노력이 이런 부분에서도 목적이 달성된다면 합리적인 논의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며 "정부가 새로운 기술로 떠오르고 있는 원격의료 논란과 관련해 의료계 등 전문가들을 비롯해 정부와 국민들의 충분한 논의와 의견수렴이 필요하다. 법 개정을 통한 논의가 진행된다면, 국회에서도 충분한 논의를 통해 이뤄져야 하고,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한편, 대한의사협회 등 의료계는 원격의료 추진에 강하게 문제제기하고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을 요구할 방침이다.
의료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유행으로 의료계에 도움을 요청하던 정부가 막상 코로나19가 주춤해지자 원래 의도였던 원격의료를 들이밀고 왔다. 이는 토사구팽과 다름 없다”라고 말했다. 다른 의료계 관계자는 “현 정권이 이전에 의료민영화를 이유로 반대했던 것이 원격의료인데, 산업화를 이유로 이를 밀어붙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라며 "원격의료의 오진 가능성과 안전성 문제 등을 따져 법 개정을 추진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