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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다음은 영화감독

    -타이타닉과 고혈압

    [칼럼] 양성관 가정의학과 전문의 겸 작가

    기사입력시간 2022-04-09 15:01
    최종업데이트 2022-04-09 15:01

    양성관 작가의 의학 칼럼 쉽게 쓰기 
    양성관 가정의학과 전문의 겸 작가의 ‘의대 교수와 전문가들을 위한 칼럼 쉽게 쓰기’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의대 교수와 전문가들은 의학 논문 쓰기에는 익숙하지만 칼럼을 비롯한 일반적인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의대 교수들이 건강칼럼을 쉽게 쓰면 쓸수록 올바른 의학정보가 같은 전문과는 물론 다른 전문과 의사들, 그리고 일차 의료기관의 의사들, 나아가 환자들에게까지 두루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시작 자체가 어려운 의대 교수와 전문가분들이라면 관심과 참고 부탁드립니다. 

    ①간만에 청진기 대신 펜을 드신 교수님께
    ②글로 살아남기
    ③작가의 필살기
    ④타이타닉과 고혈압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배가 제법 나온 60대 초반의 아저씨가 오늘 첫 환자입니다. 밖에서 잰 혈압이 165/100입니다. 손에 들고 있는 건강검진 결과지에는

    <고혈압 의심, 가까운 병원에서 의사에게 진료받으십시오>

    라고 적혀 있습니다. 환자에게 물어보니 매번 혈압을 재면, 160 이하로 나와본 적이 없다고 하네요. 그런데 환자가 대뜸 묻습니다.

     "약 꼭 먹어야 해요?"

    그 말에 고혈압이 코로나처럼 전염이라도 된 듯 저의 혈압이 치솟으며 뒷골이 뻐근합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 앞에서 폭탄선언을 하자 "아이고, 혈압이야"를 외치며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시어머니가 된 것 같은 심정입니다. 시어머니가 김치 포기로 며느리 귀싸대기를 갈기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습니다. 

    오래 사귀던 남자 친구가 오늘 갈 곳이 있다며 다짜고짜 손을 잡고 차에 태웁니다. 평소에 조금은 수다스럽기도 한 그가  무슨 일이 있는지 긴장된 표정으로 말이 없습니다. 어디를 가는지 물어봐도 가면 안다고 그러고, 무슨 일 있냐고 해도 아무 일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옷은 처음 보는 검은 정장을 쫙 빼 입었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고급 레스토랑입니다. 고깃집이나 맛집은 자주 가지만 이런 곳은 처음입니다. 여자의 마음속에 '혹시'하는 생각이 듭니다. 둘이 사귄 지 꽤 되었고, 둘 모두 나이가 꽤 찼기 때문입니다. 

    미리 예약을 한 듯, 직원이 바로 자리를 안내해줍니다. 테이블에는 커다란 꽃다발이 있습니다.
    "예정된 대로 진행할까요?"
    "네."
     
    예상이 확신으로 변합니다. 여자의 귀에는 자신의 가슴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굽 높은 구두도 신고 화장도 신경 써서 예쁘게 하고 올 걸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와."
    통유리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우리 사귄 지 꽤 되었지?"
    "그치."

    "너의 남자 친구로 그동안 행복했어."
    "어?"
    '뭐지? 그동안, 행복했다니, 설마 여기까지 와서 헤어지잔 건 아니겠지?'

    "너의 남자 친구 그만하려고."
    "뭐라고?"
    "이제 나의 아내가 되어줘."

    그러면서 남자 친구가 손에서 반지를 꺼내 무릎을 꿇으며 말합니다.  
    "정선아, 나와 결혼해 줄래?"
    여자 친구는 눈물을 터뜨리며 말도 못 한 채 고개만 끄떡입니다.
    프로포즈를 위해 고급 레스토랑에 반지며 꽃다발에 정장까지 준비했지만, 사실 말은 딱 한 마디입니다.

    "나와 결혼해 줄래?"

    이 한마디를 위해 그렇게 남자는 그토록 많은 준비를 합니다.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억에 남는 제목(팔팔), 한 문장(시인, 개그맨)으로 시선을 확 끌었다면, 그다음은 치밀한 구성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시인에서 영화감독으로 변신을 할 차례입니다. 영화 '타이타닉'의 감독 제임스 카메론과의 인터뷰 중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모두가 타이타닉이 침몰한 걸 안다. 하지만 어떻게 침몰했는지는 모른다."

    다시 약 먹기 싫어 "약 꼭 먹어야 해요?"라고 묻는 환자로 돌아왔습니다. 

    “모두가 고혈압약을 먹어야 하는 것을 안다. 하지만 어떻게 먹일지는 모릅니다.”
    의사인 우리는 회의라도 열어서 토론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지금부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글을 써야 합니다. 고혈압의 원인과 치료, 치료하지 않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설명'하는 동시에, 약 먹기를 꺼려하는 환자를 '설득'해야 합니다. 거기다 요즘 사람들은 '감동'까지 바랍니다. 이건 일석이조가 아니라 일석삼조를 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단, 주어진 시간은 3분.

    어떻게 이 아저씨에게 고혈압을 이해시키고, 약을 먹도록 유도하며, 마음까지 울릴 수 있을까요?

    '고혈압 약 안 먹어도 됩니다. 고혈압은 아프지 않아요. 다만 피의 압력이 높으니까, 혈관이 터지는 뇌출혈 같은 질환의 확률이 높아질 뿐이죠.'
    이렇게 다큐로 갈까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알죠? 휠체어 탄. 대공황과 세계 2차 대전까지 이겨낸 바로 그 대통령이 고혈압인데 약 안 먹다가 뇌출혈로 임기 중에 급사한 거 아세요?'
    역사로 갈까요?

    '제가 응급실 근무할 때, 의식이 처진 환자가 왔는데 알고 보니 이상한 한약 먹으면 혈압약 안 먹어도 된다는 말 듣고 약 끊었다가 뇌출혈로 쓰러져서 온 거예요.'
    공포, 스릴러도 나름 끌립니다.

    저는 "고혈압약 안 먹어도 됩니다"라고 관심을 끈 다음, 루스벨트 대통령 이야기로 협박을 해야겠습니다. 그런데 감동이 빠졌네요. 진료 끝에 아저씨의 두 손을 꼭 잡고 "사실은 저희 아버지가 제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는데, 고혈압 진단을 받았는데 약 안 드시다가 뇌출혈로 돌아가셨습니다. 환자분이 저의 아버지 같아서 드리는 말씀인데 꼭 약 챙겨 드십시오"라고 눈물 한 방울 흘리는 혼신의 연기까지 해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을 쓰는 모든 의사가 설명과 설득에 이어 감동까지 줘야 하는 세상입니다. 의사에서 시인으로, 끝으로 훌륭한 영화감독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