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조운 기자] 중증 응급환자가 응급실을 찾지 못해 발생하는 '응급실 뺑뺑이'가 경증 환자들도 모두 대형병원 응급실로 몰리는 '응급실 과밀화' 때문이라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경증 환자로 꽉 찬 병원으로 인해 정작 중증 응급환자들의 치료는 뒷전으로 밀리는 현실에서 사실상 병원들도 수익문제로 인해 경증 환자의 응급실 이용을 방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분초를 다투는 응급심뇌혈관 환자는 응급 수술을 할 수 있는 전문진료과 의사가 있는 병원으로의 최초 이송이 중요하다. 하지만 병원 전 환자 이송 과정에 전문진료과 의사가 배제되면서 응급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마구잡이로 분류돼 최초 이송 후 다시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기 위한 응급실 뺑뺑이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망가진 의료전달체계로 경증-중증 환자 구분없이 응급실 이용 '과밀화' 심각
14일 국회 의원회관 제2간담회의실에서 열린 '응급의료체계 정상화를 위한 정책 간담회'에서 응급심뇌질환 전문가들이 최근 대구에서 추락 사고를 당했으나 치료받을 병원을 찾지 못해 끝내 사망한 10대 청소년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을 응급실 과밀화에서 찾았다.
대구시에는 이미 경북대병원을 비롯해 상급종합병원을 비롯한 대형 대학병원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쏠림으로 정작 중증 응급환자를 위한 병실과 의료인력은 모자라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조선대병원 안성환 신경과 교수(대한뇌졸중학회 정책위원)는 "세상에 알려진 이번 사건 뿐만이 아니다. 최근에는 평일 대낮에 충남 논산의 뇌졸중 환자가 진료할 수 있는 병원이 없어서 6시간 만에 광주에 있는 조선대병원으로 온 일도 있다. 다행히 수술이 잘 돼서 큰 이슈가 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권역응급의료센터는 중증도가 높은 환자들만 받아서 치료를 해야 하는데 응급실 내원 환자의 3분의 4가 중증도와 상관없이 본인이 직접 센터를 찾고 있다. 실제로 응급실 이용 환자의 절반 이상이 KTAS(한국형 응급환자 분류도구) 4~5레벨의 경증 환자다. 그렇다 보니 응급실 내원 환자의 3분의 4는 증상이 호전돼 응급실에서 귀가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2021 응급의료통계연보에 따르면 응급실 내원환자 중 KTAS 4, 5 레벨의 경증 손상 환자는 74%, KTAS 1, 2 레벨의 중증손상 환자는 3.6%에 불과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응급실에 온 환자 중 입원이 아닌 귀가 조치 당하는 환자도 71.7%로 집계됐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김태정 교수(대한뇌졸중학회 홍보이사)는 "서울대병원 응급실도 대낮부터 대기 환자가 30명씩 줄을 선다. 직접 병원을 찾은 환자들 줄 뒤에 119 구급대가 싣고 온 중증 응급 환자도 줄을 서야 한다. 줄 선 환자 중에는 만성 두통 환자들도 섞여 있다. 일부 응급실 이용 환자 중에는 '응급'해서가 아니라 빨리 검사를 받으려고 꼼수를 쓰는 사례도 있다"고 지적했다.
대학병원 응급실 과밀화, 경증 환자 '수익' 짭짤…돈 안되는 전문진료과 의사 병원 밖으로
이처럼 응급실에 '응급'하지 않은 환자들이 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안성환 교수는 "사망률이 높은 질환이 유병률도 높지는 않다. 병원 입장에서는 언제 올지 모르는 환자를 위해 병상을 비워 놓는 것 보다 경증 환자를 받는 것이 이득이다. 또 경증 환자가 오히려 병원 수익에는 도움이 된다. 병원 수익의 대부분은 초기 검사 비용인데, 이 초기 검사 비용은 경증이나 중증 환자 둘 다 똑같기 때문이다. 오히려 경증 환자는 초기 수익을 내면서도 귀가조치가 가능해 병원 입장에서는 회전율도 좋아 포기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또 그는 "사실 병원 입장에서는 수익이 낮은 과를 위해 의사 숫자를 많이 유지하는 것은 손해다. 그래서 응급실에 응급심뇌질환 환자를 위한 전문진료과의사를 배치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동아의대 신경과 차재관 교수(대한뇌졸중학회 질향상위원장)는 "현재도 대학병원들이 심뇌혈관센터를 운영하는 데 큰 부담을 호소하고 있다. 돈만 많이 들고 수익은 나지 않는 센터라고 병원에서도 찬반 신세를 당하며 실적에 대한 압박마저 들어온다. 그러다 보니 펠로우 의사를 키워도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지 못해 병원을 나간다"며 "아무런 대책 없이 현재 방식으로 심뇌혈관센터를 늘리는 것은 아무런 대책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뒤틀린 의료체계 하에서 병원조차 찾아오는 환자들을 엄격하게 중증도 분류를 통해 가려 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면서 고위험, 고난이도의 중증 응급 시술과 수술을 하는 전문진료과 의사들은 '수익'을 많이 남기지 못하면서 병원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순천향대 서울병원 이경복 신경과 교수(대한뇌졸중학회 정책이사)는 "이로 인해 심뇌혈관질환 인력은 급격히 고갈되고 있다"며 "신경과에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응급수술, 뇌수술을 할 사람이 남아있지 않다. 매일 당직을 서야 하고 고위험 수술로 인한 부담도 크다. 더 문제는 위험한 수술보다 가벼운 시술이 수가가 더 높다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대학병원을 나와 주간에만 비응급 시술을 하면서 돈은 더 많이 버는 편을 택하는 의사가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119구급대-전문진료과 직접 연결 채널 마련하고 역량 갖춘 권역심뇌혈관센터 확충해야
이 같은 현실 속에서 심뇌응급질환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트리아지'가 중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안성환 교수는 "심뇌응급환자가 응급실에 오면 먼저 경증인지 중증인지 환자를 빠르게 판단해서 골든타임 안에 응급 시술과 수술이 진행돼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환자 이송 결정을 구급대와 응급의학과 의사가 판단하고 있다. 실제 치료는 소수의 전문진료 전문의가 하지만 전문진료과와 상의 없이 환자를 거부하거나 의사가 없는데 환자를 덜컥 받아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이경복 교수 역시 "응급센터에는 응급의학과의 기준만 있고, 전문진료과의 의견은 배제된다. KTAS가 작동한다고 하지만 모든 응급환자에 대한 것으로 일원화돼 있고, 응급의학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응급심뇌환자의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이 발생한다"며 "뇌졸중은 처음부터 IVT(정맥내혈전용해술)만 필요한지 EVT(동맥내혈전제거술)도 필요한지, 뇌수술까지 필요한지 알기가 어렵다. 24시간 이내 뇌졸중 의심 환자가 100명이라면 실제 뇌졸중은 대략 60명으로 비 뇌졸중이 40명이다"고 말했다.
그는 "병원 전부터 중증 심뇌질환자인지를 감별할 수 있도록 119 응급구조사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또 응급심뇌질환 환자에 대한 판단과 분류는 애초부터 전문진료과가 담당할 때 더욱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중증심뇌질환자는 응급의학과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만큼 병원 전 단계부터 119구급대와 전문진료과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채널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학회측 교수들은 이렇게 분류된 중증심뇌질환자가 곧바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진료역량이 강화된 권역심뇌혈관센터를 확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우선은 권역심뇌혈관센터를 전국에 약 25개를 세우고 이 안에는 뇌졸중 신경과 전문의 최소 5인이 트리아지를 담당하고, 시술 전문의 최소 3인, 뇌혈관수술 전문의 최소 3인을 갖춰 지체 없이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첫 이송 단계가 꼬여서 전문진료과에서 심뇌응급환자를 볼 수 없는 상황이 됐을 경우, 의료진이 직접 신청하면 119 구급대가 병원 간 이송을 도와주는 이송 시스템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은 전원을 보낼 때 신경과 의사가 직접 병원에 연락해서 사설 구급대를 불러 환자를 이송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장기적으로는 전공의 정원을 늘리고 전공의가 전문의를 취득한 후에도 응급뇌질환을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 수술을 하는 의사들이 권역센터와 같은 큰 병원에 오도록 확실한 유인책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