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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의료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칼럼] 박인숙 울산의대 명예교수·전 국회의원

    기사입력시간 2024-06-25 13:45
    최종업데이트 2024-06-25 15:06

    사진=게티이미지뱅크 

    [메디게이트뉴스] 대한민국 의료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진짜 재앙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대통령의 한마디로 촉발된 의료대란이 4개월째 접어들면서 환자들의 고통이 날로 깊어가고 있다. 나는 그동안 이 사태 해결에 다소나마 도움이 될까하는 희망을 가지고 개인 의견을 간혹 내곤 했으나 이제 더 이상 희망을 이야기할수조차 없는 막바지 지경에 이르게 됐다.

    나쁜 정치

    결국 모든걸 지배하며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다. 정치에서 희망이 사라지면 나라의 미래가 사라지는 것이고 국민은 도탄에 빠진다. 그래서 지금의 의료대란으로 인한 진짜 재앙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사태가 이지경까지 온 것은 나쁜 정치가 시작한 일이고 따라서 정치적으로 풀어야 하는데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판을 보면 여, 야 막론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막장 드라마도 이런 막장드라마가 없다. 대통령과 정부관리들은 서로 경쟁하듯 망언, 모욕, 거짓 정보, 협박을 수시로 내뱉고 있다. 차라리 코미디 드라마이기를 바라지만 이것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라는 사실이 진짜 비극이다.

    내가 8년간 국회에서, 그리고 그 전후로 합해서 십여년간 정치권에 몸 담은 경험으로 미뤄볼 때 지금 대한민국은 예측가능한 국가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 한 사람과 주변 몇 사람이 거의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그것도 수시로 ‘깜짝 쇼 ‘형식으로 대통령이 직접 발표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이제 의료계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대통령이 한 약속에 대해 국민여론이 나쁘면 즉시 없었던 일이 돼버리고, 의대증원 같은 국민이 좋아하는 정책이면 절대 후퇴는 없다. 이런 일이 수시로 일어나면서 국민을 긴장시키고 있다. 그런데 의대정원 확대는 국민은 물론 거대 여,야 정당 모두가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정책이라 더더욱 의사들의 반대가 무시되고 있다. 

    대통령의 독단적 주장에 대해 브레이크를 걸어줄 마지막 기대를 국회에 해볼 수 있으나 지금의 국회 상황을 보면 그것도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최근 국회는 횟수를 거듭할수록 의원들의 질적 하향평준화가 일어나면서 더욱 나빠지는 것 같다. 대부분 정치인들에게서 오로지 개인의 탐욕만이 번뜩일 뿐, 의료재앙과 국민고통은 안중에도 없어 보인다. 

    대통령의 2000명 의대증원 발표는 자기 지역에 의대신설이라는 달콤한 공약을 낸 22대 여야 의원들에게는 ‘물 들어올때 노 저어라’는 말처럼 모처럼 찾아온 호기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22대 국회에서 온갖 악법들이 발의되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법안은 '의평원법'인데 내가 19대 국회에서 교육부의 격렬한 저항을 무릅쓰고 통과시킨 법이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은 의평원법을 개정해 의평원의 지위와 권한을 축소시킴으로써 의대정원 확대와 의대신설을 가능하게 만드는 법안을 발의했다. 짐작컨대 이런 개정안들은 여야 간 이견이 없고 정부가 원하기 때문에 통과될 가능성이 우려된다. 

    각 당의 대통령후보는 일반 국민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당원들이 선출한다. 하지만 지극히 편향된 정치이념으로 무장한 거대양당의 당원들도 대부분 국민이나 국가의  미래에는 관심이 없는것 같다. 적극적인 당원들은 오로지 팬덤정치에만 몰입돼 있거나 또는 본인들의 공천 및 이해관계에서의 유불리 만을 기준삼아 각 선거에서 후보를 선택하기 때문에 이런 정당들에게 어떠한 기대도 할 수 없다. 가히 선거제도의 심각한 문제, 나아가 민주주의의 종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러 배경상황을 볼 때 현 정치권에 큰 기대를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 의료사태를 국회를 통해 정치적으로 풀어야한다는 주장을 해왔다. 그러나 불과 두어달 사이에 정치권과 언론에 의해 마녀사냥식 무자비한 의료파괴 현상을 목격하면서 ‘국회의원 사용법’ 같은 한가하고 순진한 글을 더 이상 쓰기가 두려울 지경이다. 

    나쁜 언론

    사실 더 큰 걱정은 국민 건강이나 국익을 생각하기 보다 의사 악마화에 앞장선 주요 언론들이다. ‘무관의 제왕’이라는 말 그대로 왜곡된 보도 때문에 의사 악마화가 고착화되고 있다. 그 결과 국민은 잘못된 정보로 세뇌돼가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대책없이 빠져들어가고 있는지 인식조차 못하게 돼버렸다. 

    대다수 우리 국민은 대한민국에서 의료는 그냥 공기나 물처럼 원하면 언제, 어디서라도 싸고 쉽고 누릴수 있는 당연한 복지서비스 정도로 생각하게 됐다. 그러면서 의사들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까지 사라졌다. 의사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욱 악화 시킨 것은 나쁜 정치인과 악의에 찬 언론선동의 결과다. 

    평생 '소아심장학'이라는 필수과 진료를 하며 힘든 세월을 자부심과 보람(소위 ‘바이탈 뽕’) 하나로 버텨왔다. 이제 은퇴한 상태에서 과거 고생이었다고 생각되던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그 때가 순수하고 열정이 넘친 시절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의사에 대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하면서 결국에는 지금의 사태까지 와버렸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의사라는 직업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만 주구장창 외우면서 감히 돈 벌 생각은 애초부터 가져서는 안 되고, 오로지 국민을 위한 봉사, 심지어는 희생까지도 감수해야 하게 됐다. 그러다가 간혹 치료 결과가 좋지 않으면 민,형사 처벌까지 받을 각오를 가진, 값싼 공공재라는 인식이 국민 사이에 굳어져가는 것 같다.

    이는 나쁜 정치권과 언론 탓도 있지만 우리 의사들 자신의 자정력 부족, 정치력 부족, 무관심도 한 몫 한다. 이에 대해 나를 포함해 선배 의사들이 젊은 후배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대한민국의 최고 수준의 의료는 이제 빠르게 비가역적이고 영구적으로 파괴되고 있다. 지금 우리 국민은 정치인과 언론, 그리고 일부 시민단체, 환자단체들에게 선동당하고 세뇌당하며 자신들의 미래가 어떻게 망가지는지도 모르고 의사들만 비난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지금은 대통령이 의료계를 향한 무리한 ‘명령’을 거둬들이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그리고 사욕에 가득찬 여야 국회의원들이 벼락맞듯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의료재앙은 조만간 그 종말을 볼 것이다. 그 결과는 우리 국민이 더 이상 값싸고 세계 최고수준의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사망율 증가 뿐 아니라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서 발생하는 초과사망도 급증할 것이다.

    이런 변화는 보건의료계를 넘어서 이공계 폭망으로 인한 대한민국 산업계 전체에 미치는 막대한 손실, 나아가서 극심한 저출산의 부작용과 함께 결국 대한민국의 존립자체에 큰 재앙이 될 것이다.

    정말로 나쁜 것은 이런 종말적 상황을 의사들은 다 예상하면서 국가와 국민을 걱정하고 있는데 최고위층 정치인들만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줄곧 국민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의료계에는 대통령과 정부의 망국적 고집에 저항할 현실적인 방안이 사실상 남아있지 않다. 대규모 궐기대회, 학생 휴학, 전공의와 교수들의 사직, 휴업, 휴진, 파업 등 여러 시도를 해봤으나 뚜렷한 성과를 내기 힘들고 비난의 목소리만 커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대정부 투쟁을 이끌 의료계 내부의 다양한 직종 간 의견 조율이나 합의도 기대하기 어렵다.

    학생, 전공의로 대표되는 젊은 의사들과 이 모든 모순과 문제점들을 감내하면서 살아왔던 기성세대 의사들 간의 불신과 소통부재가 단일 요구안을 도출해 내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름도 여럿인 각종 협의체, 위원회를 만들어 보지만 이해관계가 각기 다르고 진작에 상호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쉽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이 난리와 희생을 치르고도 또다시 정부와 정치권에 주도권을 내주며 진정한 의료개혁을 포기하고 의료계의 일방적인 항복이라는 재앙적 종말을 맞이하게 될까봐 심히 우려된다. 

    이제는 대통령이 의대정원 증원과 필수의료 패키지를 원점 재검토하겠다는 ‘기적’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어쩌다 대한민국이 이 지경이 됐는지 통탄하지만 그래도 너무 자학은 하지말고 기적을 믿어보자, 아니면 어쩌겠나?


    ※칼럼은 칼럼니스트의 개인적인 의견이며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