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정부의 의대정원 확대 정책 추진이 한창인 가운데, 의사정원 책정을 위한 논의 구조 자체를 다시 설정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즉 새로운 판에서 다시 논의를 진행하자는 것이다.
현재 보건복지부는 의료계와 논의하는 '의료현안협의체', 환자·시민단체를 포함하는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등 정부 주도의 일시적 논의 구조를 고수하고 있다.
한국의학교육협의회는 29일 오후 4시 서울대학교 암연구소 2층 이건희홀에서 '의사정원 책정을 위한 거버넌스 구축 토론회'를 개최했다.
정부 주도 일시적·개별 논의 구조 탈피해 상설적·비정치적 거버넌스 만들어야
이날 모인 전문가들은 기존의 일회적이고 개별적인 논의 구조에서 벗어나 상설적, 비정치적 거버넌스를 만들어 국내 의사 수 문제를 꾸준히 논의해야 한다는 점에 공감대를 이뤘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안덕선 원장은 "의사정원 문제는 꼭 해결해야 되는 문제이지만 방법에 있어선 이견이 많다"며 "따라서 기존의 정부 주도의 정원 책정 구조에서 탈피해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결정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이종태 정책연구소장은 "의과대학 학장들 사이에서 '지역 필수의료 문제가 의사 수와 부족에서 기인하느냐'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76.7%가 의사 부족이 아니라 분포와 지원의 문제라고 답했다"며 "정부와 전문가 사이에서 의견 차이가 상당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복지부에서 관련 회의를 4번이나 개최했는데 성과가 있을 것으로 전망하느냐는 질의에도 94.1%가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며 "이 답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부와 전문가들이 이렇게 서로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에선 어떤 긍정적인 논의도 이뤄지기 힘들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종태 정책연구소장은 앞으로 의사정원 추이를 결정할 때 정부의 역할 변화가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봤다. 일방적으로 정책 실행을 지속하기 보단, 전문가를 비롯한 이해관계자들과 협력하고 정책을 함께 결정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의사 수 추이 문제는 정부와 비정부 조직 간 강력한 협력이 필요한 일이다. 정부 내부 또는 외부에 독립적인 상설 기구를 구축해 정치적 독립과 전문직업성, 핵심 이해관계자가 참여할 수 있는 신뢰 받는 거버넌스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의정협의체-보정심 둘로 나뉘어 논의 구조…체계적 고찰 가능할까?
정부가 기존 의료현안협의체 이외 보정심에서도 의대정원 문제를 함께 논의하도록 한 점에 대해서도 지적이 나왔다.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양은배 수석부원장은 "의대정원 논의의 장이 뒤바뀐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지금 상황을 보면 민관 협력이 아니라 논의가 단순히 행정관리 차원으로 변질될 것 같아 우려된다"며 "과학적 근거와 관련 자료들을 종합해 체계적 고찰이 선행돼야 한다"고 비판했다.
한국의학교육학회 윤보영 총무이사도 "필수의료 기피 현상은 의사 수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박리다매식 의료 과소비와 의료전달체계 왜곡 등 다양한 문제로 기인됐다"며 "서울의대 졸업생 20%가 인턴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상황에서 의사 수만 늘린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윤 총무이사는 "필요한 의사 수는 매년 달라진다. 가변성이 있어야 한다"며 "이를 결정하기 위해선 양질의 연구와 예측이 가능할 수 있는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미래 예측이 가능하려면 전문가들이 대거 포함될 수 있는 논의구조도 함께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태완 대한중소병원협회 부회장은 의사 부족 문제를 바라보는 색다른 해결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제언했다. 꼭 의대정원을 조정하지 않더라도 해외 우수 의료인력을 수입할 수 있는 지원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 부회장은 "의대정원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지 발상의 전환도 필요하다고 본다. 처음 서울아산병원을 설립할 때 미국에서 우수한 인력을 많이 채용해 온 것으로 안다. 이런 점에서 고안해 향후 우리나라도 외국의 우수한 인력을 스카우트하거나 채용하는 방식을 도입할 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토론회에선 현재 의대정원을 대폭 늘리려고 하는 정부 정책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 우봉식 원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비교 수치만 따져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이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우 원장은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를 비교한다고 했을 때 2021년 기준 OECD 국가 평균 의사 수는 3.73명, 우리나라는 2.57명으로 약 1.16명의 차이가 있지만 현재 의대 정원을 유지하더라도 의사 배출과 인구구조 변화를 감안하면 우리나라의 인구 1000명당 의사수는 OECD 평균 수치를 빠르게 따라잡게 돼 2040년이 되면 한국 3.85명, OECD 평균 4.83명으로 격차가 0.98명으로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그는 "2063년이 되면 한국은 6.49명이 되고 OECD 평균은 6.43명을 넘어서게 된다"며 "당장 인구 1000명당 활동의사 수는 한국이 OECD 국가 평균보다 적다고 하지만 한국 인구 1000명당 활동의사 수의 증가는 OECD 평균보다 높기 때문에 결국엔 OECD 평균 인구 1000명당 활동의사 수를 따라잡게 된다"고 말했다.
노인 고령화를 중심으로 봐도 한국 의사 수는 오히려 과잉이라는 게 우 원장의 견해다.
한국와 일본간 노인인구 비율을 비교해 보면 노인비율이 20%인 시점이 일본은 2006년이었으며 이때 일본의 총 의사 수는 26만6000명,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2.08명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고령화율이 약 20%가 되는 시점은 2025년으로 이때 예상 의사 수는 14만5800명이다.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로 따져보면 2.84명으로 일본 대비 의사 수는 3만9000명 정도가 과잉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같은 방식으로 노인 비율이 30%인 시점은 일본이 2023년으로 총 의사 수는 35만3000명(인구 1000명당 의사 수 2.87명)으로 한국은 2035년이 돼야 고령화율이 30%가 된다. 이때 총 의사 수는 17만7000명(인구 1000명당 의사 수 3.49명)으로 한국이 일본에 비해 의사 수가 3만1500명 과잉되는 것으로 예측된다.
우 원장은 "여러가지 지표상 한국과 가장 유사한 국가인 일본과 고령화 비율을 비교했을 때 한국은 의사 수가 부족하지 않다"며 "OECD 국가별 건강수준 평가, 코로나19 당시 초과사망율 등을 봤을 때 무작정 의대 정원을 늘리는 것 보단 필수의료 분야에 의사가 근무할 수 있도록 정책적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의사 수 확대가 필요하다는 통계로 활용되는 한국 의사의 평균 임금에 대해서도 우 원장은 OECD 발표자료를 단순 비교하기 어렵다고 봤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한국 의사의 평균 임금을 약 2억3970만원이라고 발표한 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봉식 원장은 "해당 수치가 발표된 이후 의사들이 돈도 많이 벌면서 사명감이 없다는 뉘앙스로 일부 언론들이 의사들을 매도하고 있다"며 "그러나 최근 발표된 OECD 데이터에 따르면 의사의 임금을 각국의 화폐단위, 명목환율, 구매력평가환율 등으로 공개하고 있는데 명목환율로 보면 한국 봉직 전문의 급여는 31개 국가 중 7위 수준으로 중상위에 그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반면 구매력평가 환율에 따르면 1위다. 그러나 정부의 보도자료엔 환율 자료는 빠지고 구매력평가환율만 담고 있어 한국 의사들의 급여가 높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있다"며 "특히 OECD에서 발표한 자료엔 38개 국가 중 우리나라보다 국민 소득과 의사 급여가 높은 룩셈부르크, 호주, 미국, 일본 등 통계는 누락돼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