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조운 기자] 글로벌 제약사의 혁신 신약과 국내 연구진의 임상 역량이 만나 한국 환자의 치료 문제를 해결하고 세계 치료지침까지 바꾸고 있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신약 개발에서 한국이 단순한 임상시험 참여국을 넘어 새로운 의학적 근거를 만들어내는 국가로 자리 잡았다고 평가했다. 다만 삼중음성유방암과 난치성 혈액암처럼 치료가 어려운 질환에서는 생존기간 연장을 넘어 완치율을 높이고 부작용과 치료 부담을 줄이기 위한 연구가 계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길리어드 사이언스 코리아는 22일 서울 더플라자호텔에서 창립 15주년 기자간담회를 열고 국내 연구진과 함께 진행한 임상연구 성과와 향후 연구개발 방향을 공유했다.
길리어드 코리아는 2011년 국내 법인 설립 이후 HIV와 바이러스성 간염, 항진균제, 항암제 등에서 12개 치료제를 공급했다. 현재 길리어드가 진행하는 전체 글로벌 임상시험 가운데 한국이 참여하는 비율은 약 43%이며, 항암제 임상시험으로 범위를 좁히면 약 60%가 국내에서 진행되고 있다.
최재연 길리어드 코리아 대표는 지난 15년간 HIV·간염·항암 등 미충족 수요가 높은 질환을 중심으로 치료제를 공급하고, 한국 연구진의 글로벌 신약 개발 참여를 확대했다고 밝혔다.
최 대표는 “지난 15년이 과학 혁신과 다양한 파트너와의 협력을 통해 치료의 가능성을 넓혀온 시간이었다면, 다음 15년은 혁신의 혜택을 더 많은 환자의 치료와 삶의 변화로 연결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환자 문제에서 출발한 연구, 미국·유럽 치료지침 바꿔
이날 패널토의에서 반준우 서울아산병원 임상시험센터 소장은 국내 연구진이 실제 진료현장의 문제에서 출발해 세계 치료지침을 바꾼 B형간염 연구를 대표적인 성과로 꼽았다.
과거 국내에는 효과가 우수한 B형간염 치료제의 도입이 다른 국가보다 늦어지면서 기존 치료제에 내성이 생긴 환자가 많았다. 특히 여러 약제에 내성을 보이는 다제내성 환자가 많아 이를 어떻게 치료할지가 중요한 임상적 과제였다.
당시에는 내성 환자에게 여러 치료제를 함께 사용하는 병용요법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병용치료를 하면 일부 약제에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환자의 경제적 부담이 컸고, 여러 약제를 사용하는 데 따른 부작용 부담도 있었다.
국내 연구진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테노포비르 단독요법과 테노포비르·엔테카비르 병용요법을 비교하는 연구자 주도 임상시험을 제안했다.
연구 결과 단독요법은 병용요법과 비교해 효과가 열등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두 가지 약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유사한 치료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반 소장은 “병용요법이 기본이던 시점에서 단독요법을 비교한 것은 상당히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며 “연구 결과가 국내 가이드라인뿐 아니라 미국간학회와 유럽간학회 가이드라인까지 바꿨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 환자가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국내 연구자가 고민해 만든 연구 결과가 세계 치료지침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C형간염 치료제 임상시험에서 보여준 국내 연구진의 실행력도 강조했다.
반 소장은 “국내 임상시험에서 일주일 만에 모든 환자 등록을 마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며 “혁신성이 높은 신약을 한국 환자에게 빠르게 제공하려는 연구자들의 열의가 합쳐져 나온 성과”라고 평가했다.
그는 “글로벌 기업의 혁신 신약과 국내 연구진의 연구 역량이 만나 새로운 근거를 만들었고, 이는 국내 환자에게 더 나은 치료 기회를 제공했다”며 “한국이 글로벌 신약 개발에 기여할 수 있는 중요한 방식”이라고 말했다.
“완치 이후에도 미충족 수요 남아…더 편하고 안전한 치료 필요”
이경훈 서울대학교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길리어드의 연구개발을 ▲치료가 가장 어려운 질환에 대한 도전 ▲환자의 미충족 수요 해결 ▲과학에 기반한 돌파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평가했다.
이 교수는 삼중음성유방암을 치료제 개발이 가장 어려운 암종 중 하나로 꼽았다. 호르몬 수용체나 HER2를 표적으로 삼을 수 있는 다른 유방암과 달리 삼중음성유방암은 뚜렷한 치료 표적이 없어 치료제 개발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는 “삼중음성유방암은 여전히 가장 도전하기 어려운 분야이자 미충족 수요가 큰 영역”이라며 “항체약물접합체라는 혁신적인 플랫폼이 새로운 표적 치료 가능성을 열었다”고 말했다.
혈액암 분야에서는 CAR-T 치료제가 기존 치료에 실패한 난치성 환자의 치료 가능성을 넓힌 사례로 언급됐다. 환자의 T세포를 추출해 암세포를 인식하도록 유전적으로 조작한 뒤 다시 투여하는 방식으로, 기존 치료와 달리 한 번의 투여로 장기간 생존이나 완치 가능성까지 기대할 수 있게 됐다는 평가다.
이 교수는 치료제가 환자를 완치시키더라도 미충족 수요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완치가 가능해져도 더 편리한 치료, 부작용이 적은 치료, 완치율이 더 높은 치료에 대한 수요는 계속 남는다”며 “치료가 어려운 질환일수록 생존기간뿐 아니라 치료 과정과 환자의 삶까지 고려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젊은 환자가 많은 삼중음성유방암의 특성을 고려하면 치료제 개발을 넘어 환자 가족의 심리·사회적 부담까지 살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했다.
이 교수는 “젊은 유방암 환자는 사회에서 일하거나 자녀를 돌보는 연령대가 많아 환자 개인뿐 아니라 가족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며 “과학적 혁신과 함께 환자와 가족이 겪는 심리적 어려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역할도 중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