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배진건 칼럼니스트] 사이언스(science)와 비즈니스(business)는 전혀 다른 두 섬이다.‘사이언스 to 비즈니스’, S2B가 연결되기 위해서는 두 섬을 잇는 다리(bridge)가 꼭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탁월한 과학적인 연구라도 상업화로 연결될 수가 없다. 신약 개발의 경우 사이언스 섬으로부터 다리를 쌓아 올리는 연구개발본부장과 비즈니스 섬으로부터 다리를 쌓아 올리는 사업개발본부장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최종의사결정자인 CEO가 서로 잘 협력해야 한다. 두 다리가 제대로 이어져야 비로소 두 섬이 연결되고 S2B가 결실을 맺는다.
면역항암제란 인체의 면역체계를 활성화시켜서 암세포와 싸우게 하는 암 치료법이다. 최근 3세대 항암제로 부르는 면역항암제가 전체 항암제 시장을 이끌며 주목을 받고 있다. 제약회사 Bristol-Myers Squibb(BMS)의CTLA-4 억제제인 여보이(Yervoy,ipilimumab), PD-1 억제제인옵디보(Optivo, nivolizumab)와 머크(북미권 외의 국가에서는 MSD)의 키트루다(Keytruda, pembrolizumab)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면역항암제의 연구개발 분야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기사가 있으니, 필자는 다리놓기의 주인공, 브릿지빌더(bridge builder)인 연구본부장과 CEO가 어떤 상황과 관계에서 제품화를 완성했는가 관점을 짚어보겠다. 이번 주는BMS, 다음 주는 머크(MSD)의 사례를 다뤄보고자 한다.
BMS 사이언스 섬의 브릿지빌더인커스 박사(Francis M. Cuss, MD)는 영국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환자를 돌보는 의사 생활을 하다가 마지막 영국 생활 3년동안 영국계 제약회사 글락소(Glaxo)에서 일했다. 그 후 1987년부터 미국으로 옮겨 쉐링프라우(Schering-Plough, S-P)에서 초기임상연구 부사장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이후 1990년 그는 기초연구, 그 중에서도 면역학을 더 배우고자 하는 개인적인 일념으로 ‘Discovery Research’에 속한 면역학 부서에 보직 직위가 강등된 ‘Associate Director’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해서 당시 같은 회사분자약리학 부서에서 일하던 필자와 가까이 일하며 알게 됐다. 1999년 필자가 ‘EP2’를 타깃으로 항암제를 개발하려고 S-P 연구본부장 격인 Pickett 박사 앞에서 과제제안 세미나를 했다. 마친 후커스 박사는 “진건, 이 과제가 계속 진행될 때 오늘 픽켓 박사의 질문은 계속 이어질 것 같네. 셀레브렉스의 특허 만료 후 제네릭이 나온 후에 이와 경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 말이네”라고 조언을 주었던 것이 생생하다.
임상 책임자에서 ‘Associate Director’로 강등하면서까지 연구에 올인했던 커스 박사는2003년 17년 동안 정들고 몸 담았던 S-P를 떠나 BMS 의 ‘Discovery Research’책임자 지위로 이직했다. BMS의 피터 돌란(Peter R. Dola) 회장이 커스 박사의 친구였고, 적극적으로 스카웃했다는 풍문이 있었다. 그가 왜 그 때 옮겼을까? 사이언스 섬의 책임자와 비즈니스 섬의 책임자가 서로 코드가 맞아야 신약 개발이라는 다리를 제대로 놓을 수 있다.
아마 당시 2003년 4월 S-P에 새로 부임한 프레드하산(Fred Hassan) 회장과 코드를 맞춰 일하기 어렵겠다는 판단 때문이 아닐까 추측한다. 신약을 만들어 회사의 몸을 키우기 보다는 합병을 통한자산 불리기의 경력으로 잘 알려진 하산 회장밑에서는 사이언스의 다리 짓기가 힘들다는 판단으로 추측된다. 예상대로 결국 하산 회장은 2009년 머크와 S-P의 합병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황금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
1990년대 메다렉스(Medarex)는 형질전환 생쥐 플랫폼을 이용해 비교적 신속하게CTLA-4항체를 발굴하는데 성공했다. 커스 박사가 BMS로 옮긴 바로 다음 해인 2004년 메다렉스가 자체 플랫폼을 이용해 발굴한 이필리무맙 항체의 임상개발을 BMS와 협력해 진행했다. 임상 2상을 거쳐 임상 3상의 결과에 근거해 2011년 미국 식품의약국(FDA)는 BMS의 CTLA4 항체를‘여보이(Yervoy)’라는 상품명으로 흑색종 환자의 치료제로 판매를 허가했다. 이 항체가 최초로 시판된 면역항암제로, BMS는 세상에 없던 면역 체크포인트 억제제를 세상에 선보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만약 이 항암제에 기존의 항암제와 같은 평가기준을 적용했다면 이 임상시험은 실패로 간주됐을 것이다.사이언스 섬 브릿지빌더의 노력으로 면역항암제의 효능 평가의 기준을 기존 항암제의 객관적 반응율 대신 생존율로 바꿨기 때문이다. 면역항암제라는,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영역의 ‘First-in-class’ 혁신신약일 경우, 이의 효과를 판단하는 기준 자체가 때로는 달라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몸의 면역체계에는 기억(memory)능력이 있다. 면역항암제가 일부의 환자에 작용해 그 환자 내의 면역세포는 암세포와의 면역 반응을 기억하고 이로 인해 항암 효과가 지속되는 것이다.
메다렉스는 CTLA-4 항체를 발굴한 것과 동일한 형질전환 생쥐 플랫폼을 이용해 2000년대 초 PD-1에 대한 항체인 니볼루맙(nivolumab)을 비교적 신속하게 발굴했다. CTLA-4와 PD-1은 서로 다른 기전으로 면역세포를 활성화하는 타깃이며, PD-1의 경우 전임상 연구와 동물모델 연구를 통하여 부작용이 덜 할 것으로 예상돼 좀 더 바람직한 타깃으로 간주됐다. BMS는 이미이필리무맙의 개발 과정에서 구축된 면역항암제에 경험 있는 임상연구자 네트워크를 PD-1 항체의 임상개발에도 다시 활용할 수 있었다. 임상에서도 먼저 개발된 CTLA-4 항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부작용을 보임으로써 PD-1이 면역체크 포인트 영역의 중요한 항암제 시장을 형성할 것이 확인됐다.
2017년 12월 FDA는 Opdivo(니볼루맙)의 흑색종에 대한 판매 허가를 내렸다. 이 이면에는 사이언스의 섬에서 부단히 다리를 쌓아 올린 커스 박사 군단의 노력과 그와 동시에 그 역할을 존중해 주고 가설을 끝까지 믿어주어 상업화로 다다르게까지 같이 길을 닦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비즈니스 섬의 브릿지빌더들의 노력이 있었다.
이런 인연을 배경으로 2009년 7월 BMS는 인간항체 개발기술인 '울티맙'(UltiMAb)을 보유한 메다렉스를 24억 달러에 인수하게 됐다. BMS는 메다렉스의 인간 항체의약품 개발기술을 확보하고, 동시에 3상 임상시험이 진행되고 있는 이필리무맙에 대한 권리를 100% 취득했다. 동시에 항암제 및 면역질환 치료제 파이프라인을 현저히 확장했다. 이런 혁혁한 다리 짓기 공로로 2013년 7월 커스 박사는 BMS 연구개발 총책임자 CSO로 임명됐다.
그는 책임자가 되자 곧 BMS의 ‘Discovery’의 연구 영역 중 대사 증후군,신경과학,바이러스 영역을 과감히 제외시키고 면역 항암제와 전문 질병(specialty disease)을 주 연구 영역으로 확정했다. 이런 결정은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BMS와 같이 대형 제약사 조차 선택과 집중의 전략을 취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는 2013년 당시 CEO인 Lamberto Andreotti와의 합의일 뿐 아니라 2007년의 전임 CEO인 James M. Cornelius의,회사 주력 방향 변경에 대한 오랜 바람을 뒤늦게 실현한 결정이었다.
전임 CEO 입장에서 비즈니스 섬으로부터의 다리 짓기는 바이오의약품으로의 투자였다. BMS는 2007년 매출의 약 6%에 해당했던 바이오의약품이 2016년 매출의 50%를 넘어서는 순간이 바로 전임 CEO의 미래투영의 실현에 해당됐다. 10년 전 CEO가 꾼 꿈이 그대로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사이언스 섬과 비즈니스 섬이 성공적으로 연결되는 감동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제약사의 현실은 어떠한가. 사이언스와 비즈니스는 전혀 다른 두 섬이기에 S2B로 연결되려면 두 섬을 잇는 다리짓기에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사이언스 섬의 연구본부장과 비즈니스 섬의 CEO가 비전을 서로 공유하고 있는가?비전을 공유하며 다리를 짓는 대등한 관계인가? 혹여 다리가 만날 지점의 방향이 서로 다른 곳이지는 않은가? 브릿지빌더 양 축의 서로가 존중하고 합의해 다리 짓기를 진행할 때 비로소 두 섬이 연결되고 꿈이 실현된다. 최초의 면역 체크포인트 저해제의 탄생이 신약개발 역사 상 최고의 성공 사례로 손꼽히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