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임솔 기자] “밀려드는 환자들의 응급수술에 치이다 보면 당직이 아니어도 당직처럼 일할 때가 많아요. 그러다 보면 연속당직을 3,4일씩 하기도 합니다. 환자는 계속 해서 늘어나는데 의사수는 그대로라 힘들어도 어쩔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A대학병원 외과계열 교수)
“퇴근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퇴근 이후에도 상시로 환자 상태에 대한 보고를 받습니다. 정말 위급하면 병원에 직접 나가야 합니다. 대체할 의사가 없어서 다른 지역 학회에 가더라도 불려오기 일쑤에요. 그러다 보니 주당 근무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B대학병원 내과계열 교수)
일선 의사들이 과도한 근무와 당직에 따른 ‘번아웃(BurnOut)’을 호소하고 있다. 특히 상급종합병원에서 생명을 살리는 진료과로 구분되는 ‘필수의료’를 담당하는 의사들의 하소연이 많다. 국립중앙의료원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과 길병원 신형록 전공의 등 과로사까지 발생한 가운데, 의사들의 번아웃 문제에 대한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주당 60시간 이상 일하면 과로, 응급환자 앞에선 근무시간도 소용 없어
대한의사협회가 올해 3월 마련한 의사 과로사 해결방안 토론회에서 서울성모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김형렬 교수는 과로 인정 기준을 크게 3가지로 뒀다. 주당 60시간 이상 근무하거나 주당 52시간 이상 근무하고 가중요인이 1개일 때, 또는 주당 52시간 미만으로 일하고 가중요인 2개 이상일 때다.
가중요인은 ▲근무일정 예측이 어려운 업무 ▲교대 업무 ▲휴일이 부족한 업무 ▲유해한 작업환경에 노출되는 업무 ▲육체적 강도가 높은 업무 ▲시차가 큰 출장이 잦은 업무 ▲정신적 긴장이 큰 업무 등이다.
의협 김연희 법제자문위원(법무법인 의성 변호사)은 “의사는 노동 강도가 높고 전문성을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하고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윤리수준도 높다. 다른 직업군에 비해 스트레스가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했다.
그는 “하지만 연속 근무와 당직 등 단순히 다른 직업에 비해 근무시간이 길다는 것만으로 과로 재해로 인정받을 수 없다. 통계자료를 통해 다른 직업군에 비해 과로사가 많다고 판단되면 의사의 과로 인정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국내에서 의사 과로에 대한 정확한 연구결과는 아직 없지만, 최근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전담전문의의 근무시간이 길거나 전담 환자수가 많은 등 과로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대한중환자의학회가 중환자실 전담전문의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담 전문의가 주당 50시간 이상 일하는 비율은 54%였다. 중환자실 전담 전문의의 32%는 주당 60시간 이상 근무하는 것으로 조사됐고 주당 50~60시간은 22%, 주당 40~50시간은 19%, 주당 40시간 미만은 24%였다.
문제는 위급한 환자 상황을 살펴보다 보니 근무시간 자체를 정확히 알 수 없고, 퇴근 이후에도 계속 환자 상태를 확인하거나 긴장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중환자의학회 박성훈 홍보이사는 “전담전문의들의 과도한 근무는 환자들에게 피해가 돌아갈 것이 분명하다. 앞으로 전담전문의들의 과도한 근무현실에 대해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며 “전담전문의에 대한 충분한 수가보장과 근무조건의 개선은 중환자실 생존율 향상뿐만 아니라 미래의 중환자실 인력 확보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밝혔다.
미국도 필수의료에서 번아웃, 주당 40시간 미만 근무 인정
미국 의사들도 번아웃에 시달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미국 의료정보사이트 메드스케이프가 올해 1월 미국 의사 1만5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번아웃이라고 생각하는 의사는 전체 응답자의 44%에 달했다. 우울하다고 응답한 비율도 15%였다.
번아웃이 가장 높은 진료과는 비뇨기과 54%에 이어 신경과 53%, 재활의학과 52%, 내과 49%, 응급의학과 48%, 가정의학과 48%, 내분비내과 47% 등의 순이었다. 반면 공공의료와 예방의학의 번아웃 경험이 28%로 가장 낮았다.
번아웃을 느끼는 근무시간은 주당 71시간 이상이 57%로 가장 많았고 주당 61~70시간 50%, 주당 51~60시간 48%의 순이었다. 가장 길게 근무할 것으로 생각되는 진료과는 외과가 77%로 가장 많았고 비뇨기과 76%, 심장내과 72%, 호흡기내과 68%, 신장내과 68%, 중환자실 65% 등 미국 역시 필수의료 영역에서 근무시간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에서 가장 많은 번아웃을 느끼는 이유는 너무 많은 행정적인 업무(59%)에 있었다. 차트 작성과 서류 작성 등이 여기에 해당했다. 그 다음이 과도한 근무시간 34%이었고 이어 전산화 작업 증가 32%, 의사 부족 30% 등이었다.
미국은 주당 40시간 근무의 워라밸이 기본적으로 보장되는 사회적 환경이 근본적으로 우리나라와 다르다. 미국 귀넷클리닉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주원 전문의는 국내 강연에서 “9시에 진료를 시작해 6시면 끝난다. 하루 평균 20명 정도의 환자를 진료한다. 워라밸을 꿈꾼다면 이 곳으로 오라”라고 말하면서 국내 의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밀려드는 상급종합병원 환자에 전공의법, 극심해지는 번아웃
의협은 의사들의 과로사가 문제가 되자 올해 1월 종합병원 이상 의사들을 위한 '준법진료 매뉴얼'을 제작, 배포했다.
준법진료 매뉴얼에 따라 봉직의와 교수들에게 근무시간을 주당 40시간과 1일 8시간 이상 초과하지 않을 것을 명시했다. 연장근로는 합의에 따라 실시하되 1주에 12시간을 초과하지 않도록 했다. 업무 수행에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근무시간 외나 토요일, 공휴일에 근무할 수 있고 토요일 또는 공휴일 근무시 다른 근무일에 휴무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같은 준법진료 매뉴얼이 있어봐야 밀려드는 환자들 사이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심지어 2017년 8월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문재인 케어)로 상급종합병원의 환자들은 더욱 늘고 있다.
보건복지위원회 최도자 의원(바른미래당)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 42개 상급종합병원의 총 진료비는 2016년 10조5000억원에서 2017년 10조9000억원으로 3.6% 완만하게 증가하다가 문재인 케어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2018년에 28.8%가 증가했다.
상급종합병원 진료비 명세서 건수도 2016년 4000만건에서 2017년 3900만건으로 1.5% 줄었지만 2018년 4500만건으로 전년대비 13.2% 급증했다.
전공의들이 주당 80시간 이상 근무하지 못하게 하는 전공의법 시행 이후 이렇다할 대책 마련이 나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사들의 번아웃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일선 대학병원 의료진들은 환자수를 제한하거나 근로시간을 엄격히 제한하고 인력을 충원해달라는 공통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대학병원 의료진들은 “밀려드는 환자에 추가로 의료인력을 고용할 수 있도록 수가를 반영하거나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의료에서 일할 사람이 부족하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번아웃에 시달리고 있다. 이렇게 되면 본인의 건강은 둘째치고 결국 환자안전에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