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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포 청년이 일생의 꿈을 펼친 대구의학전문학교

    [경북의대 100주년 칼럼] ③이재태 경북의대 100주년 준비위원회 자문위원단장

    기사입력시간 2023-01-13 12:00
    최종업데이트 2023-02-01 07:27

    경북의대 100주년, 새로운 100년을 위해  

    2023년은 경북의대 전신인 대구의학강습소로부터 개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경북의대는 한 세기 동안 훌륭한 의료인과 의학자를 배출한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 의학 교육 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지금까지 배출된 9000여명의 졸업 동문은 환자 진료 및 의학 연구에 매진해 국내외 의료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이에 따라 경북의대는 2023년 8월 27일부터 9월 3일까지 100주년 기념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메디게이트뉴스는 경북의대 10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와 함께 지나온 100년을 기념하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릴레이 칼럼을 게재한다. 

    ①권태환 경북의대 학장·경북의대 100주년 공동준비위원장
    ②박재율 경북대 의과대학 동창회장·중앙이비인후과 원장
    ③이재태 경북의대 100주년 자문위원단장·경북의대 핵의학교실 교수 

    대구의학전문학교 개교

    1902년 조직된 일본 의사들의 단체인 동인회(同仁會)는 일제의 조선 진출 시 의료 분야 도우미 역할을 했다. 일제의 동아시아 팽창 시 의료선봉대로서 한반도, 대만, 만주에 진출한 동인회는 경부선 철도 부설 공사 노동자나 관련 일본인의 의료 지원을 위해 1907년 대구와 평양에 일본인 의사를 파견해 동인의원을 창설했다. 서울대병원의 전신인 대한의원 설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의 사업 목표는 “병원을 개설해 최신 의료를 제공하며 의학교를 설립해 졸업생들을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는 각지에 분포시키는 것”이었기에 의료 활동과 의학 보급을 통한 일본의 이익 실현에 앞장섰다. 을사늑약 후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한 일제는 1909년 전국 주요 도시에 자혜의원을 설치하기로 결정했고, 1910년 2월 해산한 대구동인의원 시설과 장비는 9월 개원한 대구 자혜의원으로 이관됐다. 대구자혜의원은 경북대학교병원으로 이어진다.  

    근대 의료기관이 설립되기 시작했으나, 체계적인 조선인 의료 인력 양성은 되지 못했다. 1919년 3.1 운동 후 일제는 교육 중심의 문화통치를 표방했으나 의사 양성기관은 경성의학전문학교(관립 의전醫專)과 세브란스연합의전(사립 의전) 두 곳 만 있었기에 필요한 수의 의사는 배출할 수 없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22년 “현재 조선에는 의사의 결핍이 심하고 동시에 의료 기관이 극히 부족해 이를 보충하기 위해 평양과 대구에 의학전문학교(의전 )를 설립할 계획‘이라 발표했다.  
     
    1923년 1월 평양자혜의원이 구내에 사립의학강습회를 설립해 의사시험 준비생에게 수업을 했고, 같은 해 5월 평안남도 도령(道令)으로 도가 지방비를 지원해주는 2년 과정의 도립평양의학강습소로 승격됐다. 자혜의원 의관이 강사를 겸임하는 의사 양성 기관 설립에 관한 소식은 대구에도 전해졌고 대구자혜의원 의관이 의학강습소 설립을 경상북도 지사에게 청원한다. 이에 1923년 7월 23일 3년 강습기간의 대구자혜의원 부속 사립의학강습소 설립이 인가됐으니, 이것이 ‘개교 100년을 맞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 대구의전의 시작이다. 7월 첫 입학생을 받은 대구의학강습소는 1924년 경상북도립 대구의학강습소로 승격됐다. 1926년 4년 교육 과정으로 개편되며 1927년 제1회 졸업생 29명(한국인 22명, 일본인 7명)이 배출했다. 그러나 4년 과정 개편 후 입학생은 3년이 지난 1930년에 2회 졸업생이 됐고, 1932년까지 70명이 졸업했다.
     
    의학강습소는 4년 과정이었으나 조선에 위치한 입지 관계로 졸업생에게 의사자격 시험을 치게 했다. 당시 일본의 의대 졸업생은 졸업 후 바로 의사자격증을 주었기에 이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의학강습소의 의전 승격이 필요했다. 기존 의학강습소 규정은 폐했고 1929년 경상북도는 새 도립 대구의학강습소령(令)을 발표했다. 교수진은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나, 이때 임용된 박태환은 도립 대구의학강습소의 최초 임용 교수이자 한국인 교수였다. 1933년 총독부는 4년제 대구의전과 평양의전 설립을 인가하며 3월 개교했고, 대구의전에 16명의 교수(교수 14명, 조교수 2명)가 발령됐다.

    대구의학강습소 재학생 235명은 해당 학년에 편입됐고, 3월 25일 4학년 44명(일본인 32, 한국인 12)이 대구의학전문학교 제1회로 졸업했다. 1, 2회 졸업생은 경성제대, 경성의전, 대구의전 등에서 3개월 보수교육 후 의사면허를 받았고, 3회 졸업생부터는 바로 일본 후생성 발급 의사면허를 받았다. 44년(13회)까지의 전체 졸업생은 764명(49 –69명/년)이고, 한국인 학생 수는 일본인의 반 이하였다. 식민지인 만주와 대만 출신도 있었다. 입시 경쟁률이 높아 1939년 70명 모집에 600명이 지원했고 해방 전 마지막 해인 45년 입학생의 경쟁율은 20:1에 육박했다. 

    각종 차별 조치로 인해 한국인 학생들의 입학이 더욱 어려웠다. 조선 내 의료 수준 향상을 목적으로 한 의학교육가관 설치였음에도 대구의전 졸업생의 23%는 일본으로 취직했고, 일본인 졸업생 30% 이상은 일본으로 갔다. 한국인 졸업생의 36%는 경상도 지역 외로 취업했다. 경북 내 취직한 졸업생은 전체 졸업생의 14% 정도에 불과했고 일부는 연구직, 군의관 입대를 택했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으로 대구의전의 일본인 교수와 학생들이 일거에 철수하게 되자 남은 한국인 교수들을 중심으로 새 진용을 구축해야 했다. 1945년 10월 미군정청의 방침으로 대구의전은 정규 의과대학으로 승격됐고, 1947년 도립 대구의과대학이 됐다. 1949년에는 의예과가 설치되며 6년제 의과대학가 됐고 1951년 전국의 주요 거점에 국립대학교가 설립되며 국립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편입돼 오늘에 이르렀다. 
     
    1950년 한국전쟁 시 육군본부건물로 징발된 경북의대 본관)

    식민지 목포출신 황기석의 대구의전 

    황기석(黃基錫 1924–1997)은 전라남도 목포에서 가난한 농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한반도 남서부 끝 목포는 일제 강점기에 호남평야의 풍부한 농산물을 일본으로 공출하는 항구로 개발됐기에 도심은 번성하고 항구는 흥청거렸으나 식민지 국민들의 삶은 궁핍했다. 그는 1937년 목포 북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상업전수학교에 입학해 주산 및 경리 실무 업무를 교육받았다. 당시 상업학교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일반계 고등학교 진학이 어려웠던 공부 잘하는 한국 학생들이 취업 기술을 습득하던 곳이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의 보통학교와 상업학교의 3년 후배였다.

    어린 시절 그는 보통학교 등하교 길 언덕에 위치한 성당에서 국민들을 구호하며, 교육시설을 개소해 어린 학생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던 신부와 수녀들의 보았다. 선교사들의 희생에 감화를 받아 그도 어두운 길을 밝혀주는 하늘의 별빛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는 1940년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강원도 태백의 석탄 광산의 경리로 취업한다. 직장에서 성실해 상사의 신임을 얻어 봉급도 인상됐으나, 사고가 빈번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는 탄광촌민들의 궁핍한 삶을 목격하며 이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다. 공부를 더 해 보다 의미있는 일을 찾아야겠다는 열망이 동시에 생겼다. 경리 일을 병행하며 2년간 주경야독 끝에 1942년 어려운 총독부 시행 전문학교 입학 검정시험에 합격하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관립 경성제대 의학부, 경성의전, 대구의전, 평양의전 중 대구의전에 지원해 합격했다. 그해 75명을 선발하는데, 한반도와 일본 등지에서 941명(12.5:1)이 지원할 정도로 경쟁률이 높았다. 
     
    1944년 대구의전 1학년에는 낙제생 포함 110여명의 재학했고, 일본인이 70% 한국인은 30% 정도였다. 전라도에서 온 대구의전 졸업생 일부는 1944년 개교한 광주의전(현 전남의대)의 창립 교수가 된 바 있다. 대구의전 정원은 70명이었으나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고 매년 일본인 입학생 수가 3분의 2를 상회했으니 이는 일본인 우대 정책이 있음을 시사한다. 1930년대 이후 학생들의 부친의 직업을 분류한 자료를 보면 일본인 아버지(96명)들의 가장 많은 직업은 관료인 관사(27.6%)였고 의사와 변호사(21.4%), 상업(13.3%), 농업(12.2%), 은행원 및 회사원(4.1%)의 순이었다. 반면 한국인의 아버지(68명)의 직업은 농업(61.8%)이 월등했고 관사(23.5%), 상업(22.1%) 의사와 변호사(8.8%)의 순이었다. 식민지하 한국민 80%가 농업 종사자였으니, 학생들도 빈한한 농촌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대구의전의 한국인 학생 수는 적었으나 선배들은 신입생들의 학교 생활 전반에 도움을 주었고 신원보증, 교과서 대여와 하숙집 주선까지 도왔다고 한다.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 간에 경쟁도 있었고, 일본인 교수가 한국학생들을 차별한다고 느낀 경우도 많았다. 한국 학생은  축구부를 하며 단결했고 일본 학생들 대부분 야구부에 속했다. 대결 의식은 공부에서도 치열해 한국인 학생들 대부분은 성실하고 성적도 우수했다. 어느 해 한국인 학생 한명이 개교 이래 처음으로 낙제를 하자, 한국 학생들 모두가 나서서 그가 한국인의 수치라며 분개해 학생의 자퇴를 종용한 일까지 있었다. 2학년이던 1945년 여름 일본 패망으로 일본인 교수와 학생은 모두 귀국했고, 학년에 한국인 학생 40여명만 남았다. 그는 1948년 교명이 바뀐 대구의대를 졸업해 의사면허를 받았으며 경북의대 16회 졸업생이다. 

    황기석의 학교 성적부를 보면, 일본학생들과 경쟁적으로 공부하던 1944년 성적은 전체 118명 중 30등 정도로 상위권이었으나, 해방 후인 3, 4학년 성적은 전체 40여 명 중 하위권인 35등 정도였다. 일본인 교수들이 떠난 학교의 강의 공백이 커서 수업도 부실했지만, 극심한 좌우갈등으로 학창 생활도 정상적이지 못했다. 학생들 간의 테러도 난무하고, 대구의전이 불을 당긴 역할을 했던 대구 10.1 폭동 등 좌우익 투쟁장이 된 해방 공간은 혼란스러웠고 공부에 집중하기도 어려웠다. 연고가 없는 대구에서 홀로 자취하며 학업에 열중하던 목포 청년은 생활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힘든 시절이었다고 회고한다.  
     
    졸업 후 내과학교실의 조교로 의사생활을 시작한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9월에 군의관으로 징집, 야전사단 의무대에 배치돼 전황에 따라 남북으로의 전진과 후퇴를 거듭했다. 강원도 전선의 이동외과 병원과 육군병원에서 전상자를 돌보던 시기에 만난 부산출신 간호장교 하기순와 만나 가정을 꾸몄다. 야전병원 군의관 시절 처음 본 미군 의무부대의 풍족한 진료설비와 미군 군의관들의 해박한 의학 실력에 감동한 그는 의학 공부를 더 많이 해야겠다는 결심하고 군 생활 중 틈틈이 공부해 미국 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전쟁 직후인 1954년 소령으로 전역 후 홀로 미국 유학을 떠나 스프링필드병원의 인턴 수료와 4년 간 뉴욕의 병원에서 내과학 및 혈액학 수련을 받았다.

    혈액학은 우리나라에서는 강의도 받지 못했던 낯선 분야였고, 그가 경험한 혈액 환자는 기생충과 영양 결핍에 의한 철 결핍성 빈혈이 모두였다. 유전적 빈혈, 백혈병, 림프암등의 다양한 혈액질환에 관한 수련 뿐만 아니라 임상 수혈학과 혈액은행 운영에 관한 첨단 지식도 배웠다. 
     
    전쟁 후의 피폐한 나라에 가족을 두고 혼자 떠나야 했던 유학생활이 편할 수 없었으나, 밤낮없이 바삐 일했고 고국에 대한 향수를 느낄 시간도 없었다. 1957년 샌프란시스코의 혈액학회에 처음 참석해 눈앞에 펼쳐진 태평양의 푸른 바다를 보자, 그 바다 건너의 가족이 떠올라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더라고 회고했다.
     
    1958년 귀국 후 경북의대와 병원 교수로 발령받은 황기석은 혈액검사실과 혈액은행을 정비하고, 환자 진료를 시작했다. 전국에서 엄청난 난치성 혈액 환자들이 진료실로 모여들었다. 미국 유학 전에는 우리나라에는 심각한 혈액 환자가 없다고 생각했으나, 어디에 숨어있었다가 나타났나 싶을 정도로 많은 재생불량성 빈혈, 백혈병, 출혈 환자들이 찾아와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는 당시 첨단 학문으로 각광받던 핵의학에도 관심을 둬서 1963년 미국 UC 버클리대에 연수한 후 임상 진료에 방사성 동위원소를 광범위하게 이용하기 시작한 우리나라 핵의학의 선구자로 잘 알려져 있다. 
     
    황기석은 경북대병원장과 의과대학장을 역임했고, 1989년 정년 퇴임한 후 새로 개교한 대구가톨릭의대의 석좌교수로 초빙돼 환자 진료와 전공의 교육에 전념했다. 1997년 8월 은퇴를 앞두고 시행한 건강진단에서 진행된 암이 진단됐고 1개월 후 작고해 가톨릭 대구교구묘원에 안장됐다.  
     
    (황기석: 1924~1997) -1924년 목포에서 태어나 태백 탄광의 경리로 일하던 식민지 청년 황기석은 끊임없이 노력해 1944년 대구의전에 입학했다. 군의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던 중에도 미래를 열기위해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고, 우리나라 혈액학과 핵의학을 개척하고 평생을 의대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의 삶에는 100년을 맞은 경북의대와 우리나라 근대의료사가 진하게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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