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하경대 기자] 수술실 CCTV설치 의무화 법안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하기 전 다급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대한의사협회 이필수 집행부에 대한 시도의사회 관계자의 항의 전화였다. 사실 이전부터 의협 집행부에 대한 항의 민원은 자주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엔 회원들의 비판의 수위가 훨씬 강했다.
“이대론 안 돼요. 대화만 하다 다 내주게 생겼어요.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수술실 CCTV 설치가 의무적으로 이뤄지게 되면 수술실에 근무하는 의사뿐만 아니라 기피과 문제 가속화나 방어 수술 조장 등 의료계 전체에 미치는 부작용이 극심하지만, 의협이 눈에 띄는 움직임 없이 법안 통과를 용인하고 있다는 게 항의 민원들의 주된 내용이다. 실제로 이필수 회장 취임 이후 정부 여당과 대화를 이어갔지만 이에 따른 별다른 성과가 없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반면 의협의 얘기를 들어보면 입장이 다르다. 180석 거대 여당이 당론 차원에서 법안통과를 밀어붙이고 잇따른 대리수술 등 언론보도로 여론이 불리한 상황에서 사실상 법안을 저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의협 집행부 관계자는 "사실상 법안 저지가 어려운 상황에서 의협 등 의료계 단체들이 반대 입장을 꾸준히 피력한 덕분에 응급수술 등에서의 예외 조항이 신설됐다. 비용 지원도 받을 수 있게 됐다"라며 '면죄부'성 발언을 내심 털어놓기도 했다.
반면 의사 회원들의 민심은 또 반대다. 심지어 의협이 투쟁 원동력 자체를 잃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지난해 전국의사총파업 과정에서 전공의 참여율은 80%에 가까웠던 것에 비해 개원의 참여는 보건복지부 추산 10~20%에 불과했다. 특히 현재 의료계는 9.4 의정합의 과정에서 내부 의견 조율에 실패하며 의견 합치가 그 어느 때보다 쉽지 않은 상태다. 이 때문에 투쟁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라는 자조 섞인 말들도 들리는 상황. 이 같은 내부 분위기를 고려하면 '투쟁 신중론'에 일부 공감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상 과정에서 투쟁 등 강경대응 카드가 아예 배제되고 있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특히 줄줄이 의료계가 소위 ‘악법’이라고 칭하는 법안들이 통과되는 상황에서 강경대응을 위한 어떤 준비 절차도 없었다는 점은 비판의 타깃이 되기 충분해 보인다.
지금까지 의협의 행보를 보면 의료개혁쟁취투쟁위원회(의쟁투)나 범의료계투쟁위원회(범투위) 등 일방적인 정부의 정책 추진에 맞서 조직적으로 맞설 수 있는 다양한 투쟁 동력이 있어왔다. 물론 극단적인 강경 대응이 오히려 결과에 악영향을 초래할 수 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대화와 협상이 결렬됐을 때를 대비해 마지막 비장의 카드가 준비되지 않은 의협의 목소리에 힘이 실릴 수 있을까.
30주 연속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허브 코헨의 ‘협상의 법칙’을 보면 협상에서 이기기 위해선 시간과 정보에서 우위가 있어야 하고 가장 중요한 ‘힘’이 필요하다. 아무런 힘이 없는 협상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여줄 바보는 없기 때문이다. 꼭 극단적인 투쟁이 아니더라도 정부가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새로운 전략, 즉 힘이 의협에게 필요할 때다. 지금 당장 투쟁을 시작한다기보다 협상력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투쟁 동력을 준비하고 조직을 세력화하는 등 준비가 필요해 보인다.
최근 의협은 수술실 CCTV법안이 법사위를 넘자 본회의 통과를 막겠다며 부랴부랴 국회 앞 릴레이 1인시위를 잇따라 전개했다. 전문간호사 관련 개정안과 관련해서도 복지부 앞 1인시위가 진행 중이다. 이외에도 향후 의사면허취소법, 진료보조인력 등 의료계가 대응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다. 그러나 의협의 최근 연이은 1인시위 등 대응 상황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왜일까.
의료계 대내외적인 비판을 의식한 것인지, 의협은 최근엔 여당 관계자인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민석 위원장과 전격적인 간담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날 모두 발언에서 이필수 회장과 김민석 위원장은 “향후 다양한 의료현안에서 적극 공조하겠다”는 식의 허울 좋은 말들을 이어갔다. 해당 발언이 진심인지 여부와 별개로 여당과 의료계의 약속이 이번에도 속 빈 강정인지, 아닌지는 다시 한번 경각심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