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굴욕 없는 병원
의대생 때 내시경실을 참관하며 있었던 일이다.
통상적으로 대장 내시경은 수면 상태에서 하게 되는데, 환자가 수면 유도가 무섭다고 해서 수면 유도를 하지 않고 내시경을 하게 됐다. 환자가 내시경 모니터를 보다 크고 검은 덩어리를 보았다. 겁을 잔뜩 먹은 표정으로 저게 뭐냐고 질문했다. 교수님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장 청소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대변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굴욕 의자’, ‘굴욕 3종 세트’라는 용어가 몇 년 전부터 퍼지고 있다고 한다. 굴욕 의자는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여성을 진료하기 위해 있는 만들어진 의자를 말하고, 굴욕 3종 세트는 출산 전 처치 과정인 관장, 제모, 회음부 절개를 말한다.
농담으로 할 수 있는 말 같지만, 이런 용어들로 인해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산부인과 진료에 대한 거부감이 커지고 있다. 이로 인해 남성 산부인과 의사를 기피하거나 산부인과 방문 자체를 꺼려 진료시기를 놓치는 여성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진료나 시술, 수술 등 의료행위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환자의 건강이다. 그러므로 모든 도구와 방법은 이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고안되고 개발된다. 이로 인해 앞선 일화처럼, 산부인과뿐만 아니라 많은 진료 과에서 환자로서는 수치심을 느낄 법한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의료진들은 마취나 수면 유도 등의 처치로 환자가 의식하지 못하게 하거나 가림막 설치 등의 방법으로 수치심을 최대한 덜어 주려 노력한다.
굴욕의 사전적 의미는 ‘남에게 억눌려 업신여김을 받음’이다. 하지만 의료 현장에 환자를 억누르고 업신여길 남은 없다. 환자를 효율적으로 검사하고 치료해줄 의료진이 있을 뿐이다.
건강을 위한 진료는 절대로 부끄러운 행위가 아니다. 굴욕 의자는 굴욕을 낳는 의자가 아니고,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고 새로운 생명이 나오는 의자다. 진료에 대한 여러 부정적인 인식보다 긍정적인 인식이 확산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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