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게이트뉴스] 예일대 의과대학 교수인 맷 마주레크(Matt Mazurek)는 미국의 의사노조와 파업에 관한 간략한 역사를 2023년 6월 7일 기고했다. 우리나라에서 3.1운동이 일어난 해인 1919년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와 일리노이주 정부 병원에서 최초로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병원의 파업은 1937년 브루클린 유대인 병원에서 처음으로 발생했지만, 병원은 노조 활동을 금한다는 주 정부 명령에 의해 미국 병원노조는 노동조합의 권리를 상실한 기록이 있다. 이는 파업으로 인해 환자에게 미칠 잠정적인 위해를 우선적으로 고려한 결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20세기 초부터 1940년대까지 미국의 전공의는 무급 형태였다. 우리나라도 전공의제도 도입당시 무급이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당시 미국의 전공의들은 이 같은 비현실적인 정책에 맞서 전국 단위의 협회를 결성하고, 이어 1975년 단체의 정체성을 노동조합으로 공표했다.
마침 영국의사회가 단체의 정체성을 ‘노조(Trade Union)’라고 밝힌 해와 동일해 그것이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시대적 흐름인지 아리송하다. 이후 전공의단체는 임금인상과 환자치료 개선을 목적으로 파업을 벌였으나 당시에 병원 파업은 불법으로 간주했다. 그렇게 파업으로 얻어낸 성과도 있었지만, 몇몇 주동자는 10일 정도의 구류에 처해지는 개인의 희생을 피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미국에서 집단행동으로 인해 전공의가 구금될 일은 거의 없어 보인다.
전공의 단체와는 별도로 네바다주에서 1972년에 ‘의사 조합’이 결성됐고, 미국의사회의 공식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미국은 현재 거의 모든 분야에서 노조 참여가 점차 감소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의사의 노조 참여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1998년에는 미국 의사 중 약 1만4000~2만명 정도가 의사 조합원이었으나 2014년에는 4만7000명에 이르렀고, 2019년 기준으로 보면 약 6만8000명의 조합원 수를 기록했다. 현재 미국 전체 의사 인력의 약 7% 정도가 노동조합에 속해 있다고 한다.
개인의 한계 ‘단체 힘’으로 사악한 거대 세력에 맞서
의사의 노조 결성의 장점은 무엇보다 의사 직원으로 협상력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많은 의사들이 직무에 대한 압박감과 소진을 느끼고 있는데 이것은 의사 개인의 저항력의 문제가 아닌 제도적인 문제가 원인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조직화 된 집단은 거대한 자본이나 거대 병원의 고용주에 대항해 근로환경의 개선과 해결책을 집합적으로 다룰 수 있다.
반면에 고용된 의사의 단독적인 이의 제기나 불만의 표출은 자칫 해고의 위험을 안고 있어 집단행동을 통한 문제 제기는 오히려 의사 신분의 보호장치로서 매우 유용하게 작동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 의과대학의 교수집단이 현재 전공의집단으로부터 ‘중간 착취자’라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교수도 지금의 전공의보다 근무 환경이 더욱 열악했던 전공의였던 시절을 겪었다. 시대가 바뀌면서 교수집단이 대형병원의 피고용인으로 전락했는데도 교수라는 명예에 가려 교수로서 혹은 병원 근무 의사로서 조직화를 못하고 불합리한 의료제도 속에 병원 확장과 ‘세(勢) 불리기’의 조력자 역할을 한 셈이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는 의과대학이 모태가 돼 훌륭한 의료기관을 설립했다고 인정하는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보다 활성화된 전국의과대학교수회나 비상대책위원회의 등장은 이제 교수사회에서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잉태한 변화의 물결을 형성해 나가는 것 같다. 그렇지만 아직도 향후에 의과대학에 소속돼 있는 교수나 임상 의사의 고용 형태의 변화와 조직화가 매우 시급한 상황으로 보인다.
파업의 정당성 정치적 내로남불 사상으로 악마화
의사의 노조 참여 단점은 단체 교섭 협약이 건전한 경쟁구조를 피하고 하향 평준화 부작용의 가능성이다. 열심히 일하는 구성원에 대한 적절한 보상보다는 균일적 보상을 추구하기에 기관의 경쟁력 약화와 근무 의욕을 오히려 감소시킬 우려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공공병원이 지니는 성과가 낮은 이유 중의 하나로도 자주 회자되는 이유 중 하나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전문직인 의사의 노조나 의사 파업에 부정적인 시각도 많다. 특히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이미 유럽과 영, 미에서는 의료가 환자와 개인의 관계로 조달되는 것이 아닌 기관에 의한 혹은 조직과 체계에 의한 의료(organized medicine, health care system)로 변모했는데 이런 논의는 식민사회에서 그리고 지독한 빈곤한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유럽이나 영, 미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가 의료제도나 보험회사의 등장 등으로 변모한 의료 환경에서 의사노조와 파업을 접하기 쉬운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의료는 의사와 환자 간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국가와 사회에서 중요한 개념을 지닌 제도적이고 체계적인 틀 속에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선진국과는 사회문화적 궤적이 달라서인지 아니면 정부의 강압적 정책에 저항하는 의사들을 통제하기 위해서인지 환자에게 잠재적인 위해의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의사 파업이 정당한 권리가 아닌 ‘사회의 악’으로 조작되고 있다.
특히 현 정권은 정부 정책에 저항하는 의사 집단을 악의 카르텔로 만들고 있다. 어찌 보면 ‘내로남불’ 사상의 극대치로 보이기도 하고 한편 ‘미완의 근대화’로 보여 씁쓸하기만 하다.
의사도 기본권으로 보호해야 할 국민의 한 사람
의료과실에 관한 처리도 선진국가 같이 배상과 재발방지 교육과 계도의 선순환 구조가 아닌 의사 개인에 대한 보복과 처벌로 집중화된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의료형사범죄화’가 진행되고 있다. 의사가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강화된 역량으로 기존의 오류를 제기하고 개선하는 것은 의료의 선순환 구조를 유도하는 전문직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의무 사항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진솔하고 정직한 오류에 대한 지적은 전문직의 선순환 구조를 확보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의료과오로 인한 형사처벌은 진솔하고 정직한 오류의 언급과 이를 개선할 빌미를 주지 않는다. 의료의 선순환 구조 확보를 위해 대부분의 의료과실은 형사법이 아닌 민사 배상을 위한 ‘불법행위법(Tort Law)’으로 다루는 것이 선진국의 사례다. 파업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의료분쟁에 과실치시상죄를 가볍게 적용하는 우리나라의 의료현실을 보면서 의료제도 선진화나 진정한 의미의 의료 개혁은 요원해 보이기만 한다.
우리나라 의사에게 미국 의사의 근무 환경이나 급여는 당연히 부러움을 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미국 의사 역시 정도는 다르나 우리와 유사한 문제도 많이 갖는다. 그리고 미국도 과거 의사 조합이나 파업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나, 그것은 이미 과거의 일이고 이제 의료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사들의 조합 가입의 증가와 파업을 보며 의사의 ‘노동계급화’, ‘피고용인화’, ‘의료기관의 대형화’와 ‘거대자본화’는 피할 수 없는 국제적인 현상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의사의 집단행동을 무조건 불법이라는 정부의 시대착오적인 모습이 매우 답답하기만 하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특성이나 차이라는 주장보다는 역사적이고 시대착오적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인간의 기본권 누구나 숨 쉬는 공기와 같아
미국은 의사 파업에 대해 적용하고 있는 현행 법률은 주마다 다르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의사는 파업할 정당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다. 그러나 환자의 피해라는 잠재적 윤리적 문제로 최후의 수단으로 간주된다. 즉 파업 이전 협상이나 조정을 통한 해결이 우선이다. 그러나 파업이 불가피하다면 반드시 필수적인 의료는 유지돼야 한다는 조건이 선행돼야 한다.
지난 2023년 영국의 전공의들의 10회 총 37일에 걸친 파업에도 환자의 사망률에는 변동이 없었고 다만 유색인종의 입원 기간이 약간 길어졌다는 사실 이외 별일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영국의 좌파 정론지인 가디언(Guardian)이 정확하고 과학적 근거에 의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의료가 개인의 사적 공간이 아닌 제도적이고 체계적인 상황에서 의사 파업은 정당한 노동 권리임을 시사하고 있는 좌파 정론지다운 보도였다.
유럽연합은 의사도 인간이기에 직업을 불문하고 집회결사와 시위는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보장돼야 하는 인간의 기본권으로 존중받고 있다. 다만 의사 파업은 주말 정도의 의료 수준 유지는 선제조건이고 이때 필수 의료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즉 우리나라처럼 생명을 다루는 보편적인 임상과가 아닌 주말 진료 수준의 최소 의료 유지가 바로 ‘필수 의료 유지(Essential Service Law)’인데, 의료제도가 이상한 우리나라에서 필수 의료는 보편적 의료로 혼용돼 사용되고 있는 현상이 마음 답답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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