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의도를 가득 메워주신 존경하는 14만 의사회원 여러분 반갑습니다.
필수의료의 최전선, 응급실만 23년째인 응급의학전문의,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회장 이형민입니다.
 
지난 2주동안은 의사들에게는 최소한 저에게는 지금껏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분노와 치욕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번에 정부는 정부와의 대화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부질없는 것인지 명백하게 알려줬기에 이제 우리 의사집단은 각성해 버렸습니다.
 
저는 오늘 이자리에서 도대체 왜 이런 사태가 발생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우리 의사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설명드리고자 이 자리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2. 가장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후배들에게 선배로써 미안하다고 이야기 드리고 싶습니다.
잘못된 정책과 제도 아래서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본인의 일생을 의업에 바치기로 결정했었을 전공의들이 이번 일로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를 입고 얼마나 많이 힘들어하고 있을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전공의들이 없으면 병원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병원의 잘못입니다. 제도의 잘못입니다. 지금껏 장시간 값싼 노동력으로 운영해야 유지가 가능했던 우리나라의 의료시스템의 문제인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선배들의 잘못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 수련이라는 명목 하에 과도한 노동과 불합리한 제도를 눈감아왔던 선배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전공의 후배들께 머리숙여 사죄합니다.
 
3. 응급실 뺑뺑이와 소아과 오픈런은 필수의료 위기가 아닙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이 문제가 정부와 의료계가 싸울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필수의료 살리기를 원하고 있었기에 서로 의견이 다르다면 견주어 좋은 것을 선택하면 되는 것입니다. 필수의료의 위기가 어느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있었던 문제라면 그 원인인 필수의료 지원과 개선으로 해결이 가능합니다. 이것이 의사가 부족해 생겼다는 것은 진단부터 틀린 것입니다.
 
응급실 뺑뺑이를 해결하려면 과밀화를 해결하고 인프라를 구축하면 됩니다. 지금껏 그걸 못한 것은 정부입니다. 소아과 오픈런이 문제가 아니라 중증소아환자 인프라 붕괴가 문제입니다. 그것 또한 정부가 조장한 일입니다.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음에도 지금껏 방관한 정부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4. 도대체 왜 2천명일까요? 왜 2천명에 그렇게 정부는 목을 매고 있을까요?
정부는 필수의료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증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본심은 문제해결을 통한 실질적인 의료개혁이 아니라 총선을 겨냥한 포퓰리즘 지지율 상승이 목표입니다. 당연히 무리인 줄 알지만 물러서면 지지율이 떨어질까봐 그렇습니다. 때문에 갖은 핑계로 그 숫자가 맞다고 억지로 우기고 반대하는 의사집단을 침묵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의사들의 말과 설명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있나요? 협의와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면 알아서 그냥 하지 왜 지금껏 협의체나 논의체를 만들어 대화를 했었나요? 의사들은 의대증원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렇게 준비없이 비현실적인 무리한 정책을 추진할 경우 의료계 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에게 심각한 피해가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성도 없고 준비도 없는 이번 정부의 증원결정은 전형적인 졸속 탁상행정입니다.
 
5. 이 사태의 본질은 너무나도 단순합니다.
국민과 의료계가 필수의료 살려달라고 정부에 요청했으니 필수의료를 살릴 방법을 논의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의료계는 필수의료를 지원하고 법적 위험성을 낮춰달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엉뚱한 의대증원 카드를 들고 나왔습니다. 둘이 의견이 다르면 서로 상의해서 더 좋은 방법을 선택하면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정부는 이것이 논의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이것은 고도의 정치적 계산일 뿐이지 절대로 국민들을 위한 정책이 아닙니다. 의료계를 파멸시키고 난 다음 차례 희생자는 국민들이 될 것입니다. 늘어난 의료비와 OECD 평균으로 내려간 의료의 질 저하 속에서 환자들은 고통받을 것입니다.
 
6. 지금 전공의들은 조용한 사직의 물결에 휩싸여 있습니다. 이들은 파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환자들의 생명을 담보로 본인들의 이익을 위한 협상을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전공의들이 사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이미 정부가 준 빨간 약을 먹고 혼돈스럽고 고통스러운 의료계의 진실을 알아버린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의사로서의 삶이 부정당하고 가치가 훼손되어버린 지금은 설령 정부가 어떤 겁박으로 그들을 현장에 다시 데려다 놓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그들의 희망과 의지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금껏 힘들지만 현장에 버텨왔던 이유는 장래의 희망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기대할 것이 없어졌기에 결국은 현장에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전공의 뿐 아니라 앞으로 이어질 전임의, 봉직의, 개원의, 교수들의 사직의 물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7. 저는 오늘 이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지금의 문제는 지금껏 오랜 기간 왜곡되어왔던 의료계의 문제이기 때문에 해결을 위해서는 의료정상화가 우선입니다.
오늘의 이 사태를 만든 것은 탁상행정, 불통행정, 고집과 욕심으로 잘못된 정책을 밀어붙인 정부입니다. 현장의 비판을 묵살하고 인권을 탄압하며 공익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라는 것도 정부입니다. 강력한 행정력으로 경찰 검찰의 사법적인 무기로 힘없는 의사들을 처벌하고 어쩌면 정부가 승리할 수 있겠지요. 최소한 지금의 정부는 국민들과 의사들을 갈라놓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정부의 승리가 아닐 것입니다. 이번 일로 무엇보다 소중한 환자-의사간의 믿음, 의사-정부간의 믿음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명감으로 일하는 의사가 없어질 것이며 어떠한 의사단체도 정부와의 대화나 협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편하고 질좋은 의료를 받던 우리나라의 의료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의대증원은 분명히 잘못된 포퓰리즘 정책입니다. 미래의 불확실성만 키울 뿐입니다. 필수의료를 살리려면 낙수효과가 아니라 직수효과가 필요합니다. 당장 필수의료분야의 처우개선과 법적위험성을 줄여준다면 수개월 안에 수 천명 이상의 전문의들이 본인의 전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전공의들이 자리를 비우자마자 경증환자의 응급실 이용이 줄며 응급의료체계가 개선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며 이렇게 쉬운 일을 왜 30년간 못해왔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의료는 질의 문제이지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 우리는 눈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도 응급의학 전문의들은 응급실을 지키고 있습니다. 정부정책에 동의한 것도 아니고 정부의 협박이 무서워서도 아닙니다. 우리가 응급환자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난 23년간 응급실에서 응급환자를 치료해 왔습니다. 제가 제일 잘하는 것은 환자를 보는 것이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도 환자를 보는 것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선 이유도 앞으로 20년간 더 응급실에서 일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의사들도 사람입니다. 우리는 공무원도 아니고 공공재는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환자보는 것을 좋아하고 가족들을 먹여살리는 이 나라의 국민일 뿐입니다.
 
어제 날짜로 응급실을 그만둔 한 전문의가 제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지난 세월 응급실에서 밤새워가며 최선을 다해 일해왔지만 이젠 더 이상 환자나 보호자의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돈을 더 벌기 원한것도 아니고 편한 것을 바란것도 아닌데 이기적인 의료카르텔로 몰아가는 정부와 악플러들이 너무나도 밉고 두려워져서 그만두게 되었다고, 그리고 밤새 울었다고 합니다.
 
더 이상 필수의료 의사들을 욕보이고 조롱하지 마십시오. 그대로 가만히만 놔둬도 스스로 알아서 열심히 할 의사들을 욕하고 때리고 처벌하여 필수의료 현장을 망가뜨리는 것은 정부라는 것을 국민들께서 알아주셔야 합니다.
 
정부는 의대생, 전공의, 그리고 의료계에 대한 탄압을 즉시 중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의료계를 진정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로 생각해 주기 바랍니다. 국민과 의사와 정부는 함께 가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 회장 이형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