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회장 추무진)는 삼일절을 맞아 일제강점기 민족의 독립을 위해 분연히 일어선 50명의 의사 독립운동가를 발표하고, 그 유가족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고 밝혔다.
의협과 '한국의사100년기념재단'은 2008년 연구용역을 발주해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왔으며, 29일 의학도를 포함한 50명의 의사독립운동가를 발표했다.
의협은 "이번에 발표한 독립운동가는 국가보훈처가 공훈심사를 통해 이미 훈격을 확정한 분들"이라며 "정부의 엄격한 검증절차가 끝난 분들을 우선 선정함으로써 객관성과 공신력을 확보했다"고 강조했다.
50명 중에는 서재필 박사처럼 많이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김필순, 주현측, 이범교 선생 등 활약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의사독립운동가 김필순
일례로 김필순 선생(1878~1919)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면허 의사다.
그는 도산 안창호와 결의형제를 맺고 1907년 신민회 조직 당시 회원으로 활동했고,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해 이동녕, 전병현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힘썼다.
그 후 내몽고 치치하얼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매입해 이곳에 100여 호의 한인들을 이주시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의 후방 기지를 개척하고자 노력했다.
정부는 김필순 선생에게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주현측 선생(1882~1942)도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인 신민회가 창립되자 평안북도 지회에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 평안북도 조사원으로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와 대한적십자회 회원 등으로 활약했다.
1927년 귀국해 사재를 털어 대동고아원을 창설했는데, 이는 도내 유일의 고아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안창호가 서울에서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계량주의적 민족운동단체인 '동우회사건'에 연루돼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또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2년에는 미국선교사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금한 사실이 탄로나 혹독한 고문을 당해 60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1972년 독립유공자로 건국공로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다.
이범교 선생(1888-1951)은 대구에서 동산병원을 개업해 의료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참가한 뒤 일본 경찰의 지명수배를 피해 상해로 망명했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에서 교통부의 교통위원으로 활동했다.
교통부는 정보의 수집 및 검토, 교환, 연락과 기밀문서의 교환 등 통신 업무를 전담하는 기구로서, 독립운동 자금의 수집 업무도 겸했다.
그는 이러한 중대한 임무를 띠고 1919년 7월에 임시정부 경북 특파원으로 임명돼 항일선전 및 군자금 조달, 임시정부 연락 임무 등을 위해 입국해 여러 차례 체포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그 뒤 만주 배영학교에서 훈련부장으로 재직하면서 2세 교육에 전념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의협 추무진 회장은 "이번에 발표한 50명의 의사독립운동가는 빙산의 일각이며 발굴 작업의 시작에 불과하다"면서 "앞으로 의사독립운동가 추가 발굴에 역점을 둬 그들의 고귀한 정신과 업적을 분명히 새기고 후대의 귀감으로 삼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의협은 조만간 '한국의사 100년사로 본 의사 독립운동' 책자를 발간할 예정이다.
의협과 '한국의사100년기념재단'은 2008년 연구용역을 발주해 의사 출신 독립운동가를 발굴해 왔으며, 29일 의학도를 포함한 50명의 의사독립운동가를 발표했다.
의협은 "이번에 발표한 독립운동가는 국가보훈처가 공훈심사를 통해 이미 훈격을 확정한 분들"이라며 "정부의 엄격한 검증절차가 끝난 분들을 우선 선정함으로써 객관성과 공신력을 확보했다"고 강조했다.
50명 중에는 서재필 박사처럼 많이 알려진 인물도 있지만, 김필순, 주현측, 이범교 선생 등 활약상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명을 받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의사독립운동가 김필순
일례로 김필순 선생(1878~1919)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우리나라 최초의 면허 의사다.
그는 도산 안창호와 결의형제를 맺고 1907년 신민회 조직 당시 회원으로 활동했고,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해 이동녕, 전병현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힘썼다.
그 후 내몽고 치치하얼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매입해 이곳에 100여 호의 한인들을 이주시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의 후방 기지를 개척하고자 노력했다.
정부는 김필순 선생에게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주현측 선생(1882~1942)도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 결사인 신민회가 창립되자 평안북도 지회에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 평안북도 조사원으로 임시정부 재무부 참사와 대한적십자회 회원 등으로 활약했다.
1927년 귀국해 사재를 털어 대동고아원을 창설했는데, 이는 도내 유일의 고아원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안창호가 서울에서 조직한 흥사단 계열의 계량주의적 민족운동단체인 '동우회사건'에 연루돼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또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2년에는 미국선교사를 통해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금한 사실이 탄로나 혹독한 고문을 당해 60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1972년 독립유공자로 건국공로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다.
이범교 선생(1888-1951)은 대구에서 동산병원을 개업해 의료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시위에 참가한 뒤 일본 경찰의 지명수배를 피해 상해로 망명했다.
1919년 4월 상해 임시정부에서 교통부의 교통위원으로 활동했다.
교통부는 정보의 수집 및 검토, 교환, 연락과 기밀문서의 교환 등 통신 업무를 전담하는 기구로서, 독립운동 자금의 수집 업무도 겸했다.
그는 이러한 중대한 임무를 띠고 1919년 7월에 임시정부 경북 특파원으로 임명돼 항일선전 및 군자금 조달, 임시정부 연락 임무 등을 위해 입국해 여러 차례 체포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
그 뒤 만주 배영학교에서 훈련부장으로 재직하면서 2세 교육에 전념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의협 추무진 회장은 "이번에 발표한 50명의 의사독립운동가는 빙산의 일각이며 발굴 작업의 시작에 불과하다"면서 "앞으로 의사독립운동가 추가 발굴에 역점을 둬 그들의 고귀한 정신과 업적을 분명히 새기고 후대의 귀감으로 삼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의협은 조만간 '한국의사 100년사로 본 의사 독립운동' 책자를 발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