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전자의무기록의 세계
이제 병원 생활에서 뺴놓을 수 없게 된 전자의무기록(EMR, electronic medical record) 시스템. 한국의 실습을 돌이켜 보자면 각 대학병원은 서로 다른 전자의무기록 시스템을 사용했고, 실습 병원 밖의 의원이나 병원에서는 몇몇 EMR 프로그램을 사용하지만 병원끼리 서로의 정보는 볼 수 없는 구조였다.
한편 미국에 넘어와서 보니 몇 가지 대표적인 전자의무기록 회사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됐는데, 그 중 가장 큰 회사이자 가장 편리하다고 알려진 것이 바로 '에픽(Epic)'이다.
현재 수련을 받는 프로그램에서는 세 군데의 병원에서 근무하게 되는데, 그 중 두 군데는 에픽을 사용하고, 다른 한 병원은 보훈병원인지라 전국에 통일된 CPRS라는 시스템을 사용한다. 서로 다른 의무기록 시스템을 사용해 보니 프로그램의 차이가 근무 효율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느끼게 된다. 동일한 오더를 내고 동일한 협진을 요청하는 과정 자체가 효율적인 전자의무기록 프로그램을 사용하면 훨씬 시간이 적게 든다.
환자 입장에서는 입·퇴원기록과 경과기록, 중요한 검사 결과는 환자를 위한 마이차트(MyChart)라는 프로그램에 연동돼 실시간으로 접근할 수 있다. 새벽에 회진을 돌다 보면 보호자가 이미 마이차트를 통해 검사 결과를 모두 확인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자연스럽게 기록을 작성할 때도 조심하게 된다.
전공의 입장에서는 가장 편리한 기능을 두 가지로 꼽을 수 있겠다. 첫째, 스마트폰과 태블릿PC에서도 어플을 내려받아 실시간으로 환자 기록과 검사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 회진을 돌면서 바로바로 결과를 확인하고, 심지어 A사 제품을 사용하는 경우 오더도 낼 수 있기에 일하는 시간을 훨씬 단축시켜 준다.
또다른 큰 장점은 케어 에브리웨어(Care Everywhere)라는 서비스인데, 에픽을 사용하는 병원끼리는 중요한 기록이나 검사 결과 등을 서로 열람할 수 있다는 점이다.
환자가 언제 어느 병원에 방문했고,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환자 본인이 기록 뭉치를 들고 오지 않아도 접속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 중 하나. 이러한 기능에 익숙해지면 어느 새 다른 프로그램을 사용하기가 힘들어진다.
미국 병원에서 근무하다 보면 '효율성(efficiency)'이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길고 자세한 기록을 남기는 의료 문화가 발달해서 그런지, 의료자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나라라서 그런지, 같은 일을 얼마나 빠르게 수행해내고 정해진 시간에 얼마나 많은 환자를 볼 수 있는지 의식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대부분 민간으로 운영되는 (물론 메디케어(Medicare), 메디케이드(Medicaid) 같은 국가 보험도 존재하지만) 보험 구조, 제약회사와 제3의 보험약제 관리 기업(PBM, pharmacy benefit manager) 등의 손에 달려 있는 약제 수가와 분배 등 복잡한 시장구조에 의해 의료의 많은 것들이 결정된다. 이에 따라 EMR의 개발과 개선에도 많은 자본과 자원이 들어간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시스템의 이면에는 열 명 중 한 명 가까이 의료보험이 없고, 주별로, 같은 주 내에서도 지역별로 의료 접근성과 건강 지표에 막대한 차이가 있는 미국의 현실도 자리한다.
휴대폰에 울리는 에픽 알람에 편리해하고 환자들이 주치의에게 보내는 마이차트 메세지에 답장하다가도 이 편리함의 이면을 생각하면 씁쓸해진다. 자신의 의무 기록을 보기는커녕 효과가 입증된 심부전 약물을 보험이 없어서 사용하지 못하고, 말기 신부전임에도 응급투석을 받을 정도로 상태가 악화돼야만 혈액투석을 받을 수 있는 의료접근성의 격차가 있기 때문이다.